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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어주는 남자:엔딩 크레딧

영화 뜯어보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 우익과 좌익, 자본주의·공산주의·사회주의 차이 (이정현)

by Robin-Kim 2024.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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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내부자들]이라는 영화를 살펴 보면서 기본적으로 진보란 사회가 좀 더 좋은 방향 그리고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었습니다.

 

▶ 영화 뜯어보기: 내부자들- 보수와 진보, 우익과 좌익에 대한 오해와 진실 (백윤식, 이병헌) 보러 가기

 

즉,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보수라는 집단이 자신들을 위한 보완책으로 선택한 자본주의 안에서- 영화 [내부자들]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반 국민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불법적인 방법들로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는데 이러한 것들을 국민을 위해 좀 더 발전된 방향으로 바꿔 나가자고 하는 것이 진보란 얘기입니다.

 

요약하면 진보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지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보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 얘기되는 고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의 힘’이라고 했으며

 

- ‘민주주의라는 개념 안에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이 하나로 합쳐져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럼 자유와 평등의 상태가 뭐냐? 이전에는 권력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이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참여하는 자의 의지가 실질적으로 권력을 결정하고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을 때, 그런 것이 자유와 평등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진보라는 것은 권리가 확산되어가는 과정’이라며 대한민국 헌법에 나온 진짜 민주주의를 얘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보수 세력이 진보세력을 ‘공산주의’라고 얘기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무지한 얘기며 친일 세력들이 근간이 되는 대한민국의 보수들이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돈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선동하기 위한 얘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그들에게 세뇌된 많은 국민들은 진보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언론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고 보수는 언론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최소한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보수와 진보를 얘기할 때 우리가 흔히 함께하는 얘기 중에 보수=우익’, ‘진보=좌익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것도 사실은 잘못 사용되고 있는 언어들입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다시피 우익과 좌익이란 말은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공회에서 온건파인 ‘지롱드 파’가 의장의 오른쪽에, 급진파인 ‘몽테뉴 파’가 의장의 왼쪽에 앉은 데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한 부분이 온건파=보수, 급진파=진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지롱드 파나 몽테뉴 파 모두 프랑스 혁명의 주체들로 왕정의 해체를 추구한 진보 세력인 자코뱅 클럽을 뿌리로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보수 세력이었던 왕과 그들의 추종 세력을 내몰게 한 것으로 실제 지롱드 파는 국민공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 선언을 채택합니다.

 

지롱드 파와 몽테뉴 파의 차이는 말 그대로 개혁을온건하게하느냐급진적으로하느냐의 차이일 뿐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땐 똑같이 진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이상하게 와전되어 ‘보수=우익, 진보=좌익’이라는 공식으로 전해졌는데 완전히 잘못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익이나 좌익은 보수와 진보를 얘기할 때 사용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다만 보수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호소하고자 진보를 폄하하려 할 때 무조건 그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이기 위해 사용할 뿐인 것이죠.

 

기득권 세력인 보수들이 주장하는 완전한 시장 경제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는 상당히 많은 모순과 부조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대한민국은 그런 모순과 부조리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요 더욱더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빈부격차, 그래서 경쟁의 출발부터 그 부에 의해 차이가 나는 사회,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지만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으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도 누리지 못하는 부실한 사회 안전망이 우리의 현실이며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 사례가 대표적으로 몇 년 전 있었던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정현이 열연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수남 (이정현)의 삶은 이런 자본주의의 모순과 진짜 민 낯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청소년 시절 수남은 스펙과 취업 사이에서 취업을 선택합니다.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닌 실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한 것이죠.

 

타고난 성실성을 바탕으로 수많은 자격증을 취득한 그녀는 졸업 후 취업에 성공하지만 첨단 문명이라는 컴퓨터로 인해 점점 설 저리를 잃게 됩니다.

 

이 것이 자본주의의 첫 번째 민 낯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과학 기술이 발달되면 될수록 가지지 못한 사람이 피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 돈으로 첨단 문명을 활용해서 비용은 줄이고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지만 가지지 못한 사람은 일자리를 잃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파고가 화두가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이 일자리였고 그래서 과학 기술을 발전 시키는데 있어서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남은 같은 회사 (공장)에서 일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후 영화의 전개, 그러니까 수남이 행동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남편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수남의 남편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보청기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청력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남은 그의 청력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먼저라고 하고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자식이 자신처럼 살지 않도록 하게 위해 집을 사는 것이 먼저라고 합니다.

 

집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민들의 삶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심리적 차이를 안겨 주기 때문입니다.

 

집이 없다는 것은 세를 들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가진 자’인 집주인의 눈치를 봐야 하며 세를 올려달라고 할 때마다 가슴을 졸이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 집이 있다는 것은 그런 마음의 고통을 덜고 최소한 심리적 안정을 가지며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틀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우선이었던 수남이 청력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자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아 더 강력한 보청기를 구매해서 착용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찾아간 병원이 귀를 전문으로 치료하는 이비인후과가 아닌 사이비 병원이었던 것인데 남편이 착용한 보청기는 불량이었고 공장에서 일을 하던 남편은 그 보청기가 일으킨 고장으로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면서 우울증을 앓게 됩니다.

 

이 부분 역시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인 것이, 가지지 못한 사람은 높은 비용이 요구되는 정상적인 치료를 받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좀 더 돈을 들여 전문적인 치료를 하는 기관에서 제대로 된 상담을 받아 제대로 된 보청기를 구매했다면 이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가진 것이 별로 없던 그들은 결국 불행을 자초하고 만 것이죠. 역시나 자본주의의 씁쓸한 민 낯입니다.

 

 

 

 우울증에 빠진 남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수남은 그의 평생 소원인 집을 사기로 하고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합니다.

 

식당일, 목욕탕 청소, 우유와 신문 돌리기는 물론 전단지 돌리는 일까지 하며 악착 같이 돈을 모읍니다. 직업에 대한 폄하는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수남이 선택할 수 있었던 일들은 그런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수남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며 이런 말을 합니다.

 

“아무리 꾸준히 일해도 집 값은 더 꾸준히 오르더라고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대출의 덫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산층과 서민들일수록 대출을 필수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고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 대사가 바로 그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대사 때문에 꽤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영화에서 수남의 모습은, 수남이 한 이 대사는 결국 우리의 모습이며 우리가 할 수밖에 없는 자조적인 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3요소인 의∙식∙주 (衣∙食∙住)의 하나인 집을 구한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서민들에게는 그토록 힘든 것일까요? 역시나 부끄러운 민 낯입니다.

 

 

 

 집을 구매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출금과 대출 이자를 갚기 위해서 은행의 노예가 되어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이죠.

 

수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그토록 고생하는 수남을 보며 스스로를 자책하던 남편은 자살 시도록 합니다.

 

집안에서 목을 매달았던 그는 다행히 죽기 직전에 수남에 의해 발견되어 목숨은 건지지만 뇌사 상태에 빠져 이른바 식물인간이 됩니다. 남편이 식물인간이 되자 수남은 더 바빠집니다. 늘 하던 수많은 일에 남편을 간호하는 일까지 해야 했으니까요.

 

그런 수남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바로 수남의 집이 있는 동네가 재개발 지역으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인데요,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안 좋은 소식도 함께 들려오는데 바로 수남의 집이 있는 곳의 재개발을 반대하는 세력 때문에 재개발이 될지의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소식입니다.

 

사실 그들은 재개발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쪽이죠.

 

다만 재개발을 위해 긴 시간 동안 노력해 온 것은 자신들임에도 재개발 우선 지역으로 확정된 곳이 자신들의 동네가 아닌 수남의 집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동네를 우선적으로 재개발하기 위해 수남의 집이 있는 동네의 재개발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뜨거운 민 낯이 다시 한번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 가진 자 vs () 가진 자또는서민 (중산층) vs 서민 (중산층)’의 구도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이 가진 사람들, 즉 기득권들은 자기들끼리 다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에서 살펴 본 그들의 특징대로 자신들끼리 연대를 하며 자신들만의 세력을 공고히 구축하죠. 하지만 서민들은 얼마 안 되는 것을 두고 서로 더 가지려고 자신들끼리 싸움을 합니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줄을 잡기 위해 서로 밀치고 잡아당기는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싸움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며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영화에서처럼 덜 가진 사람들끼리의 싸움을 조장합니다.

 

이후 오로지 재개발만이 일생일대의 목표가 된 수남은 돈을 벌기 위해 하던 모든 일을 그만두고 재개발 동의서를 받으러 다닙니다.

 

하지만 이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 바로 재개발을 반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인데요, 수남은 이 과정에서 전혀 의도치 않게 2명을 살해하고 맙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재개발 반대 세력 중에서도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는 해병대 원사 출신 도철 (명계남)입니다.

 

군인 출신이라 꼬장꼬장한 그에게 동의 서명을 받으러 갔던 수남은 그에게 무시만 당한 채 쫓겨나고 분풀이로 재개발 반대 플래카드를 향해 던진 화염지 (?)가 플래카드만 태운 것이 아니라 도철의 집까지 태우며 가스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빠른 시간에 정확한 곳에 신문을 던지고자 연습했던 노력이 이상한 곳에서 빛을 발한 순간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도철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CCTV 확인을 통해 그 범인을 수남으로 오해합니다.

 

그리고 반대 세력의 행동대장 격인 세탁소 주인 형석 (이준형)은 수남을 붙잡아 지하에 감금하고는 재개발 문제가 해결되면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편의 병간호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 하는 상황이라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던 사이에 그만 부러진 마대자루가 형석의 몸을 관통해 그 역시 죽고 맙니다.

 

수남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남을 의심스러워하던 형사는 그녀가 살고 있는 좁디좁은 고시원 방으로 찾아가 이런저런 질문을 하지만 그녀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위기를 모면합니다.

 

 

 

 하지만 살인이라는 것에 중독되어서인지 아니면 목적을 위해 살인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그녀는 3명을 더 살해합니다.

 

재개발 반대 세력의 주동자였던 동네의 심리 상담사 경숙 (서영화)을 복어 독으로 죽이고, 지속적으로 그녀를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한 다시 비좁은 고시원을 찾아와 ‘거짓 진술을 하면 재개발을 못하게 할 수도 있다’라고 으름장을 놓자 그 경찰과 함께 온 다른 경찰도 죽이고 맙니다.

 

오로지 재개발만이 그녀 인생의 전부였기에 거짓말로 한 으름장에 분개한 그녀는 살인을 하고 만 것입니다.

 

이후 재개발이 확정되고 돈을 벌자 그녀는 밀렸던 병원비를 내고 남편을 퇴원시켜 함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며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이 영화에서 수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민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열심히 산다고 살아도, 아무리 돈을 모은다고 모아도 서민의 생활은 나아지기 힘들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월급 300만 원을 받는 서민이 3억 원짜리 집을 사려면 세금도 떼지 않고 한 푼도 쓰지 않아도 100개월을 모아야 합니다. 무려 8년 하고도 4개월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300만 원을 그대로 모을 경우입니다.

 

하지만 출퇴근 교통비가 필요하고 밥도 사 먹어야 하며 전기세와 같은 공과금도 내야 합니다. 간혹 친구를 만나거나 데이트를 할 때도 돈을 써야 하며 축의금이나 조의금도 내야 합니다.

 

아이라도 있다 치면 들어가는 돈은 더더욱 많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민에게 집이란 요원한 것이며 그래서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고 대출을 받는 순간 평생을 그 덫에 걸린 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와중에 돈을 버는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들입니다.

 

건물주는 건물 임대료로 돈을 벌고 부동산을 통해 돈을 벌고 근로자들을 쥐어짜서 돈을 법니다. 그리고 이 같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등장한 것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또다시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잘 모를 뿐 아니라, 최근 인문학으로 유명하진 사람들조차 무엇이 다른지 몰라서 엉뚱한 얘기를 하는데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모순, 이를테면 부의 집중이나 독과점 또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와 같을 것들을 해결하고자 등장한 것이지 민주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공산주의는 그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갖고 모든 생산 수단을 공유화하고 그것을 통한 소득의 배분도 공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공산당의 1당 체제를 통해 ‘공동 생산, 공동 분배’를 추구하는 굉장히 급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상당히 독특한 형태를 갖게 되는데 이 1당 체제가 독재로 변질되면서 정치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누구에게나 ‘공동 생산, 공동 분배’라는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감시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처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권력이라는 덫에 빠지는 순간 독재로 빠지게 되는 것인데 공산주의는 바로 그 덫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의 목적을 잊고 지배층, 즉 공산당이라는 유일한 당의 권력자들이 부를 독점하는 폐해가 생겨났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개인 재산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산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등장한 것이 사회주의입니다.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이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인 다당제를 인정합니다. 즉 공산주의가 얘기하는 1당 체제를 지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평한 소득의 분배가 아닌 자유로운 부의 추구도 인정합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소득을 공평하게 나누려면 그 누군가는 1명이어야지 여러 명일 수 없기 때문에 다당제에서는 공동 분배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생산 수단의 사유화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도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회주의는 말 그대로 돈보다는 사회 전체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높은 세금’과 그것을 통한 ‘복지’에 힘을 쏟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은 경쟁에서 출발선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돈이 적은 사람이 여러 가지 불합리한 상황에 놓일 수 있는 환경을 차단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탄탄하게 만드는 것인데, 쉽게 말하면 돈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돈이 없는 사람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끔 사회적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죠.

 

송파 세 모녀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죠.

  

그래서 그런 국가들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회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릅니다.

 

다만 사회주의가 공산주의가 갖는 모순과 불합리한 것들 해결하고자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 공산주의와 혼동해서 오해하는데 살펴본 이처럼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더 자세히 얘기하면 이것만으로도 책 한 권이 나올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정리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헌법을 자세히 살펴 보면 우리나라도 사회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을 알 수 있습니다.

 

 

 

- 32조 1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 34조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 34조 2항: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 119조 2항: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여기까지 보수와 진보의 잘못된 정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의미를 살펴 보았는데요, 무엇이 옳다 그르다라고는 쉽게 얘기가 어렵습니다.

 

사회의 구성원, 그러니까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어 합의를 만들어 내야 하니까요.

 

다만 잘못된 정보에 의해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는 얘기로 긴 글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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