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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읽어주는 남자: 낫 아웃!

불멸의 투수 최동원 (5): 언제나 나의 영웅

by 알킴 202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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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존칭 생략)본 포스팅은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토대로 종합하여 제가 정리하였고 마지막 편에 출처를 한 번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후 1980년 대학 4학년이 되면서 최동원은 다시 '명불허전'이라는 네 글자를 세상에 알리게 되는데 그 중 하이라이트는 백호기에서 맞붙은 실업팀 '성무 (상무 아닙니다^^)'와의 경기.

 

당시 실업 최고의 타자로 알려진 김재박이 버티고 있던 성무를 맞아 단 3안타만을 내준 채 경기를 승리로 이끌며 대한민국 최고 투수의 반열에 우뚝 섰으며 그만큼 각종 스카우트 얘기가 흘러 나오게 됩니다.

 

특히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에서 직접 스카우트 부장을 보내 계약 내용을 협상하려 한다는 기사가 보도 되기도 했는데 선수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스카우터를 보내는 것이 아닌 계약 내용을 협의하기 위한 것이라니, 최동원을 NPB에서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 해 11월 동아일보가 창립 60주년을 맞아 NPB에서 3천안타를 기록한 장훈이 포함된 일본 롯데 오리온스를 초청해서 우리나라 대표팀과의 3전 2승제의 시합을 열었습니다.

 

이를테면 1990년대 생긴 한일 수퍼 게임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문제는 팀 타율이 2할 8푼이었고 홈런이 무려 180개가 넘는 롯데를 한국의 어떤 투수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1차전에 등판한 최동원은 12개의 삼진 (장훈 2개)을 잡아내며 1실점, 완투승을 이끌었고 하루 쉬고 난 다음 3차전에서 선발 김용남이 부진하자 4회에 구원 등판했지만 패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이를테면 '최동원까' 분들, 이 때를 예로 들며 최동원이 별 볼일 없는 투수라고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은 아마야구였기 때문에 알루미늄 배트를, 일본 롯데는 나무 배트를 사용하여 경기를 했고 나무배트가 알루미늄 보다 훨씬 성능 (?)이 떨어지는데 패전투수가 됐다는 것을 놓고 '한국 최고 투수'라는 얘기를 들을 자격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것 또한 좀 우스운 게, 앞서 얘기했지만 이미 최동원은 전성기를 찍고 내려오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연이은 혹사와 연투 때문에 사실 출전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한일전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출전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전에서 12개 삼진-1실점-완투승을 하고 하루 쉬고는 또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 기계라도 버티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1년, 대학을 졸업한 최동원은 한국 세미프로 롯데와 계약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이 좀 웃긴 게 롯데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팬들에게 욕먹을 짓만 하는 것이 여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계약 내용 중 계약금이 5천 만원이었는데 그 중 2,100만원만 현금으로 주고 나머지 2,900만원을 약속어음으로 주었다는 것인데요.

 

대체 구단이 선수에게 계약금을 약속어음으로 준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처사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직장인에게 회사가 월급을 약속어음으로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롯데는 최동원은 믿음을 배신하고 끝내 어음 결재를 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1982년 세계아마야구선수권대회를 마치고 1983년 프로 롯데에 입단할 때 최동원이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롯데는 시작부터 은퇴, 그리고 사후에도 최동원이라는 진정한 국보급 투수를 데리고 장난질 친 구단이며 기업인 것입니다.

 

그나마 당시 롯데가 최동원을 배려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해외 진출에 대해 막지 않겠다라고 한 부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이 알려진 것처럼 최동원에게 롯데는 고향 같은, 그러니까 뗄레야 뗄 수 없는 팀인 것이 동생 최수원 씨의 인터뷰를 보면 최동원은 은퇴 후에도 '롯데의 11번'이라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어찌됐든 롯데와 사기 계약 후 최동원은 세미 프로에 데뷔하게 됩니다. 세미 프로란 1982년 정식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비슷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리그였습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얘기하자면 10개 팀이 약 18일 동안 라운드(9경기) 방식의 경기 일정으로 봄에 전기리그 2라운드(18경기), 가을에 후기리그 2라운드(18경기)를 치렀고 전/후기 우승팀이 5전 3선승제의 한국시리즈를 치렀고, 전후기 리그 사이에의 공백기간인 여름에는 각종 국제 대회에 출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계약문제로 동계훈련을 소화하지 못한 채 리그에 데뷔한 최동원은 홈런 2개를 포함 9안타를 맞고 패전투수가 됩니다.

 

하지만 부진은 첫 경기 뿐이었고 전기리그 15번 째 경기만에 롯데가 13승을 거두며 우승을 확정 지었는데 13승 중 최동원이 12승을 거두었고, 그 12승을 만드는 동안 120이닝이라는 엽기적인 기록을 만들어 냅니다.

 

말 그대로 진정한 혹사였죠. 지금 프로야구에서 약 120 경기 동안 200이닝을 던지면 '이닝이터'라고 불리는데 고교시절과 대학시절 그토록 혹사를 당하고도팀의 15경기 동안 120이닝을 던졌다는 건...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출전한 대륙간 컵 세계 야구 대회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잠시 경기별로 살펴 보겠습니다.

 

# 8월 8일 미국전: 9회말 1사까지 최동원이 잘 막으며 한국이 4:1로 리드하고 있었으나 몸 상태가 안 좋았던 최동원의 구위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연속 안타를 허용했고 1사 1, 3루에 구원등판한 이선희와 김시진에 의해 4:6으로 역전패를 당하게 됩니다.

 

# 8월 10일 도미니카전: 단 하루만의 휴식 후 선발 등판한 최동원은 1실점 완투승을 만들어 냅니다.  이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 8월 13일 호주전: 7회에 등판해서 1이닝만 던지며 콜드 게임으로 마무리

 

# 8월 14일 캐나다전: (예선 마지막 경기/4강 결정전) 캐나다 공영 방송을 통해 캐나다 전역에 중계방송까지 된 이 경기에서 최동원은 11개의 탈삼진을 포함하여 1피 안타 1:0 완봉승을 합니다. 특히 이 1안타는 9회말 투 아웃 이후에 나온 것으로 그 때까지는 볼넷도 없이 퍼펙트 게임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캐나다 전 이후 현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게 됩니다.

 

 

 

 기사 끝 부분에 있는 캐나다 선수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We knew he's a major league pitcher and it would take a real effort to stay close. He's so fast. he can almost tell you the fastball is coming and you can't do much about it."라고 되어 있는데요.

 

번역하면 "우리는 최동원을 메이저리그 투수로 알았고 (타석에서 홈 플레이트) 가까이에 서는 것이 어려웠다. 그의 공은 너무 빨라서 패스트 볼을 던진다고 알려줘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라는 내용으로 최동원이 어떤 투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문장은 그 경기에서 200개의 공을 던졌다는 내용이 있는데요 최동원은 그런 투수였습니다.

 

요즘에는 국내건 해외건 투수가 200개의 공을 던지는 일이 없습니다. 보기 어렵죠. 하지만 최동원은 항상 그랬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 때도, 세계 대회에서도 던졌다 하면 완투, 쉬지 않고 다음날 구원 혹은 하루 쉬고 또 선발 등판 그리고 투구 수는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숫자고요.

 

여담으로 당시 한국 언론은 현지 상황을 "경기가 끝난 후 캐나다 관중들은 최동원의 놀라운 피칭에 감격해서 '초이'를 외쳤고 현지 매스컴들은 '최동원은 이번 대회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라고 격찬했다."라고 전했습니다.

 

# 8월 16일 쿠바 전 (준결승): 김시진, 이선희에 이어 3회에 구원 등판, 5.2이닝 동안 2실점(1자책). 하지만 이 경기는 콜드 게임 패를 피하기 위해 등판한 경기로 한국은 이 경기에서 지며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습니다.

 

# 8월 17일 도미니카 전 (3,4위전): 또 다시 선발 등판, 7이닝 동안 3실점 하고 마운드를 내려갔으며 연장전 끝에  15회말에 임호균이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면서 패배하고는 4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최동원은 던지는 기계가 아닐 수 없으며, 아무리 기계라도 무리를 하면 문제가 생기는데 최동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기 역할을 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이 대회 이후 최동원은 메이저리그의 정식 입단제의를 받게 됩니다.

 

지난 1977년 볼티모어에 이은 두 번째인데요, 이번 팀은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아무래도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 대회였기 때문에 토론토가 최동원을 가장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 다음 편 보러 가기 ]

 

 

불멸의 투수 최동원 (6): 언제나 나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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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 보러 가기 ]

 

 

불멸의 투수 최동원 (4): 언제나 나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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