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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읽어주는 남자: 낫 아웃!

불멸의 투수 최동원 (6): 언제나 나의 영웅

by 알킴 202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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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존칭 생략)본 포스팅은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토대로 종합하여 제가 정리하였고 마지막 편에 출처를 한 번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래 신문 기사를 보면

 

 

[블루제이스 부사장 팻 길릭은 "그(최동원)는 아마도 지금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투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메이저리그 계약을 오퍼했다."라고 말했다. 길릭은 최동원이 계약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27개월 동안 군복무해야 하는 한국의 징병제도가 걸림돌이라고 말했다.]라는 내용이 뉴욕 타임즈에 실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MLB는 아직도 우리 프로야구를 더블 A와 트리플 A 중간 정도의 수준으로 보고 있고 NPB를 트리플 A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 국가대표로 뽑힌 선수들 중에는 그들의 인식보다 훨씬 잘하는 선수도 있지만 리그 평균 수준을 그렇게 본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1981년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텐데요 그런 MLB에서 '메이저리그가 첫 번째 한국인 선수 (first Koran-born player)를 보유할 수도 있다'라고기사까지 낸 것입니다.

 

당시 이 계약이 메이저리그 계약이 아닌 스플릿 계약이라는, 그러니까 일반 신인 계약이라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 되었는데 그 이유는 최동원을 다룬 MBC 스페셜이란 프로그램에서 그 계약서가 일부 공개 되었기 때문입니다.

 

계약서에 표시된 'active Major League'란 단어 때문인데요, 원래 스플릿 계약이 아닌 메이저 리그 계약이라면 'Guarantee'란 단어가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게 좀 말이 안 되는 게 당시 최동원은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었습니다.

 

앞선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obstacle'이란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을 정도로 병역문제는 중요한 사항인데 그것이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정식 계약서를 작성했을 리가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프로그램에서 공개 됐던 계약서는 이른바 '가계약'이라고 보는 게 맞을 듯 합니다. 그리고 당시 토론토의 한국신문 (코리안 타임즈)에서도 '잠정합의'라고 실린 기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가계약이든 진짜 계약이든 그들이 몇 수 아래로 보던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를 직접 찾아와 계약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그런 내용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계약'이라는 것만 알리다 보니 오해가 불거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스포츠 기자들의 '찌라시' 정신은 변함이 없는 듯 합니다.

 

어쨌든 그런데 그 이후에 그의 계약 과정이 이상하게 꼬입니다.같은 해 (1981년) 9월 23일에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진출 관련 기사가 대서특필 됩니다.

 

 

그리고 희한한 게 같은 날인 9월 24일 미국의 Petersburg Times 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립니다.

 

 

  요약하면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한국 정부가 최동원의 병역 의무를 면제해 줄 것을 믿고 메이저리고 로스터에 등록시켰으며 계약은 이미 완료 되었다는 내용인데요. 

 

아무래도 LA가 다저스가 '계약금 20만불+연봉 15만불'을 제시하는가 하면 샌프란시스크 자이언트까지 최동원 영입경쟁에 뛰어들자 불안함을 느낀 토론토가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등록을 해버린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당시 최동원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증거를 대라고 하곤 하는데 증거는 여기 있습니다.

 

 

The Complete Handbook of Baseball 1982 (Zander Hollander, Penguin Group (USA) Incorporated, 1982)

 

하지만 바로 다음 날 기사를 보면, 9월 15일 플라자 호텔에서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김명자 씨의 통역으로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서에 (그러니까 앞서 얘기된 가계약서) 서명을 한 최동원과 그의 아버지는 토론토에 가지 않겠다고 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른바 사기 계약을 했다는 것이 중요 내용인데요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최초 최윤식 씨 (최동원의 부친)는 계약금 20만, 연봉 20만 달러 요구

 

- 토론토는 첫 연봉 32,500 달러에 누진 승급 조건으로 4년간 61만 달러 제시- 양자 합의

 

그런데 알고 보니 토론토에서 제시한 32,500달러가 MLB 최저 연봉인 것을 알게 된 최윤식 씨가 가계약 다음 날 토론토에 항의하며 계약 파기를 주장했고 토론토도 그에 동의했으나 가계약서를 계속 보관 중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최윤식 씨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MLB 사정에 어두운 한국인을 상대로 한 가기 계약이라는 것인데요, 사실 어차피 가계약이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흥분할 필요는 없었는데, 어쨌든 일종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며파격적인 조건을 다시 제시해 오지 않는 한 토론토 입단 의사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달인 10월 최동원은 곧 있을 세미프로 한국 시리즈를 끝으로 국내 프로야구 전격 은퇴를 선언합니다.

 

가족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라고 하면서 최윤식씨는 '동원이는 지난 5년간 국가를 위해 헌신해 왔다'라는 말고 함께 이야기 말미에 '토론토로부터 새로운 제의가 있었다'라는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여기서 의문은 최동원이 왜 은퇴를 선언했느냐 하는 것인데요, 이 부분은 군 면제 부분과 상당부분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앞서 누누이 살펴본 것처럼 최동원은 병역 혜택을 받지 못하면 토론토에 입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 본 Petersburg Times의 기사에서도 그 부분이 언급 되었던 것이고요. 하지만 그 해 10월 말에 있었던 1백여명의 운동 선수에 대한 병역 혜택 명단에서 최동원은 빠지게 됩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병역 혜택 명단에는 들어가 있으나 당시 관련 법이 병역 혜택을 받은 사람은 그 날부터 5년간 그 분야에서 계속 활동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던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국내에서 5년간의 선수 생활을 더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웃긴 게 원래 이 5년이란 것이 소급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81년 10월 말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그 전으로 5년을 했어도 됐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동원은 그런 혜택을 받지 못했고 이른바 '항명'의 성격으로 초강수를 두며 한국 야구계에서 은퇴를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윤식 씨가 인터뷰에서 '5년'이란 시간을 언급했던 것으로 보이고요.

 

더 재미있는 것은 같은 해 (1981년) 캐나다의 트뤼도 수상이 9월에 한국을 방문했었는데 당시 기자회견 때 '최동원을 아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잘 알고 있다. 토론토가 최동원을 잡은 것은 행운'이라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또한 ['토론토가 최동원을 잡으면 메이저리그의 성적이 크게 뛰어오를 것이라고 팀 관계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밝혀 최동원의 토론토팀 입단을 막는 가장 큰 요인인 병역문제에 대해 토론토팀 관계자가 트뤼도 수상에게 정치적 해결을 요청했을 가능성을 비췄다.]라는기사가 실릴 정도로 최동원은 국가적인 선수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은퇴 선언을 한 이듬해인 82년 3월 13일 Montreal Gazette 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강속구 투수 최동원이 나타나지 않을 예정이다'라는 얘기인데요 쉽게 말하면 입단하지 않을 예정이다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합니다.

 

어쨌든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세미프로는 5전 3선승제의 한국시리즈를 진행했고 여기서도 최동원은 혹사를 당하게 됩니다.

 

10월 25일 - 1차전 0:3 패배 9이닝 완투 (3실점)
10월 26일 - 2차전 4:5 패배 7이닝 구원 (무실점, 9회초에 종료)
10월 27일 - 3차전 6:6 연장 6이닝 구원 (3실점, 11회 무승부)
10월 28일 - 우천연기
10월 29일 - 4차전 7:4 승리 8이닝 선발 (3실점 1자책, 8회에는 1루수로 수비)
10월 30일 - 5차전 5:3 승리 3이닝 구원 (무실점)
10월 31일 - 6차전 6:4 승리 9이닝 완투 (4실점)

(이닝에는 약간 오차가 있을 수 있음)

 

마치 롯데가 1984년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하던 상황과 너무 흡사하지 않습니까?

 

아니 쉬지 않고 매 경기 등판해서 공을 뿌린 것을 보면 1984년 보다 더했던 듯 합니다. 그리고 이 때 롯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세미프로에서 우승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최동원이 어떻게 마음을 돌려 국내 야구에 남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록되면서 프로선수가 된 최동원은 국제 대회에서 아마야구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세계야구선수권 대회나 대륙간 컵 같은 아마 야구 대회에 참가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이미 은퇴를 선언한 마당에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마음을 돌려 1982년 실업팀 한전에 입단하고같은 해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와 한대와의 역전 스리런 홈런으로 한국이 우승하며 유명해진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에 참여하는데 최동원이 마음을 바꾼 계기를 알 수 있으면 좋겠네요.

 

 

어쨌든 이미 아마 자격을 상실한 최동원이 아마 야구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기사를 보면 국제야구연맹 회장 '로버트 스미스'의 힘이 컸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이미 계약 무효를 통보하고 계약 파기에 최동원과 토론토 양측이 (구두)합의한 상태라서 토론토가 등록한 MLB 로스터는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에 다시 아마 선수 자격을 가질 수 있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기사에서 정작 관심을 끄는 것은 토론토가 최동원에게 새로운 계약 내용과 함께 비행기표를 보냈으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가 끝나는 대로 토론토에 입단할 예정이라는 내용도 있는데요, 병역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기에 토론토에 입단할 생각을 강하게 했는지 의문입니다.

 

결국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관련해서 드는 두 가지 의문은 '어떤 계기로 그가 은퇴를 번복하고 한국 야구에 남았는가'와 '병역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이후 토론토에 입단할 의사를 강하게 표현했는가'입니다.

 

어쨌든 조금 복잡하지만 여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토론토와 최동원 가계약-> 최동원 측 계약 파기 요청->토론토는 생까고 MLB 로스터에 최동원 등록 (다른 MLB 구단의 적극적인 움직임의 영향인 듯). 단 병역문제 해결된다는 조건->아마 선수 자격 박탈-> 병역문제 미해결 (최동원에게만 적용된 이상한 법)-> 짜증난 최동원 은퇴 선언: 토론토가 새로운 계약 내용 제시-> (왜인지 모르지만 은퇴 안하고) 세계 야구연맹회장의 도움으로 1982년 세계대회 참가 예정-> 대회 후 토론토 입단 예정 -> 그런데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

 

뭐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워낙 대선수가 되다 보니 조금 복잡하네요.

 

[ 다음 편 보러 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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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편 보러 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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