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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읽어주는 남자: 낫 아웃!

불멸의 투수 최동원 (2): 언제나 나의 영웅

by Robin-Kim 202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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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존칭 생략)본 포스팅은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토대로 종합하여 제가 정리하였고 마지막 편에 출처를 한 번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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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최동원의 프로선수 경력이 짧았던 이유를 '혹사'에서 찾습니다.

 

프로 생활 8년 동안 삼성에서의 마지막 2년과 롯데에서의 마지막 해인 1988년, 총 3년을 제외한 나머지 5년은 매해 200이닝 이상을 던졌으며, 그가 한국시리즈 4승을 하던 1984년에는 무려 284와 2/3이닝을 던지며 27승을 했고, 1986년에는 무려 267이닝을 던지며 19승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단' 5년을 그렇게 던진 것치고는 너무 빨리 선수 생활이 끝난 것 아니냐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의 아마추어 생활은 상상 그 이상입니다.

 

보통 그의 아마추어 시절을 얘기할 때 '고교시절 4 연속 완투 우승, 17이닝 노히트 노런, 연세대학교 23연승의 주역'으로만 기억하고 있는데요,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 경남고 시절 최동원

 

 

최동원의 중학교 기록은 거의 알려진 게 없습니다. 다만 어느 대회인지는 모르겠지만 토성중학교 3학년 때 예선전에서 9회말 투아웃까지 퍼펙트 경기를 펼쳤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습니다.

 

1974년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한 최동원은 요즘 각선미가 뛰어난 여자 연예인들이 다리 보험에 가입하듯이 어깨 보험에 가입합니다.

 

그가 안심하고 운동할 수 있도록 아버지가 50만원 짜리 보험에 가입한 것인데요, 그 해 최동원은 전국 우수 고교 야구대회 패자 결승전에서 계투로 나와 경남고의 승리를 지켜 냅니다.

 

그리고는 1975년, 최동원이란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해이자 그의 혹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 입니다.

 

1975년 화랑기 준결승 대구상고와의 경기에서 완투승을 하고 다음 날 결승전에 선발 등판하여 경남상고를 상대로 연장 14회까지 던졌지만 1:1로 무승부를 기록하자 다음 날 열린 재 경기에서 또 다시 등판하게 됩니다.

 

결과는 1:2로 지면서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준결승부터 결승까지 3일 연속 등판하여 완투를 펼친다는 것은 정말 괴물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그리고는 같은 해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 (준준결승 경북고 9이닝· 준결승 선린상고 8이닝까지)을 기록하며 최종적으로 중앙고를 이기고 우승을 하는데요. 

 

특히 준결승전에서 만난 선린상고에게는 삼진 11개를 잡으며 전날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투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실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그 해 최동원은 이미 혹사의 한 복판에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 합니다.

 

 

 * 경남고 시절 역투하는 최동원

 

그리고 같은 해 일본 고시엔 (갑자원: 효고 현 니시노미야 시 남동부 지역의 명칭) 우승팀인 니시라노 고교와의 친선 경기에서도 불꽃 투구를 선보여 일본 선수들을 긴장케 했는데 아쉽게도 7회와 9회 연속 홈런을 맞으며 패하게 됩니다.

 

6회까지는 최동원이 압도적인 투구를 보였다는 얘기겠지요.

 

이듬해인 1976년 3학년이 되어서도 최동원은 변하지 않은 실력을 뽐내며 혹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우선 4도시 초청 고고야구 대회에서 경남고를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고 이어 벌어진 청룡기 8강에서 대건고를 상대로 삼진 10개를 잡아 냅니다.

 

그리고는 4강에 또 다시 등판하여 선린상고를 상대로 삼진 11개를 뺐으며 1-0으로 승리하고는 또 다시 다음 경기인 승자 결승에서 군산상고를 상대로 1경기 20 탈삼진을 기록합니다.(승자 결승이란 게 지금으로는 어떤 방식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최종 결승에서 또 다시 만난 군산상고를 상대로 12 탈삼진을 거두며 완승을 기록, 김성한이 버티던 군산상고를 우승문턱에서 좌절시키고 마는데요.

 

 결국 이 청룡기 대회에서 4경기 연속 등판하여 2번의 완봉승을 포함 모두 완투하며 팀의 5승 중 4승을 혼자 거두고는 학교를 우승시킨, 믿지 못할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화랑대기에서도 이틀 동안 18이닝 1실점하며 우승을 이끈 것은 물론 가을에 열린 한일 고교 야구 대회 1차전에서 5회 이후 삼진 6개를 기록하며 3:1 승리의 주인공이 됩니다.

 

이 대회에서 최동원은 두 경기 등판하여 모두 완투를 하면서도 18이닝 동안 단 1실점을 허용하는 괴물 투구를 선보입니다.

 

그의 고등학교 등판 기록을 대략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연도 대회 등판 일정 기록 비고
1975 화랑대기 3일 연속 완투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 3게임 연속 완투 17이닝노히트 노런  
1976 4도시 초청 고고야구 대회   최우수 선수상  
청룡기 4경기 연속 등판 2번의 완봉, 팀 5승 중 4승 8강-삼진 10개4강-삼진 11개승자결승-삼진 20개최종결승 삼진 12개
화랑대기 2게임 연속 완투 18이닝 1실점  

 

상기 표는 제가 언급했던 대회의 기록만 정리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일본 팀과의 친선 경기 기록은 제외 한 내용입니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국내에 별의별 대회가 다 있었고 (이를테면 대통령기를 비롯한 것 등) 더구나 전국 대회의 경우 지역 예선도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파악되지 않은 그런 대회에 출전한 내용들까지 합하면어마어마한 투구수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는 20살이 되는 1977년.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최동원을 향해 일본 프로팀 롯데 오리온즈 감독인 가네다가 그를 스카웃 하려고 합니다.

 

일본 프로야구 1군에서도 통할 수 있는 강속구를 갖고 있다는 칭찬과 함께 가고시마 스프링 캠프에 한국의 롯데 자이언츠를 초대하면서최동원을 김시진, 김용남과 함께 초대합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 프로야구는 외국인 선수, 이른바 용병을 2명까지 밖에 보유할 수 없었는데 이미 용병 두 명을 확보한 상태였던 데다 최동원의 병역 문제까지 있어 스카웃 할 수 없었는데요.

 

그래서 가네다 감독은 서류상이지만 양자로라도 입적해서 일본인 신분으로 팀에 합류시키려고 했지만 최동원 할아버지의 적극적인 만류로 무산되었습니다.

 

 

* 가네다 감독

 

물론 이 같은 사실이 (양자입적 관련 내용) 2011년 박동희 기지가 가네다 감독과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조금 다른 듯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2008년 최동원 본인의 인터뷰 내용을 살펴 보면 그 내용이 사실이라고 보여 집니다.

 

아무래도 1933년 생이면서 수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 가네다가 기억하는 것 보다는 선수 본인이 기억하는 것이 더 정확할 테니까요.

 

[ 다음 편 보러 가기 ]

 

 

 

불멸의 투수 최동원 (3): 언제나 나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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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투수 최동원 (1): 언제나 나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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