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상 존칭 생략)본 포스팅은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토대로 종합하여 제가 정리하였고 마지막 편에 출처를 한 번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1982년 아마야구팀 한전에 입단한 최동원은 앞서 얘기한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지만 그 대회에서의 스타는 최동원이 아닌 선동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의 최동원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요, 아마 그간의 혹사로 인해 특별히 주목할만한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앞서 살펴 본 임호균 선수의 인터뷰에서도 이미 전성기를 지난 시점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참고로 최동원이 토론토도 롯데 자이언츠도 아닌 실업 팀 한전에 입단한 이유는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출전을 위한 아마선수 자격 유지를 위한 임시방편인 듯합니다.
의아한 것은 이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이 우승하면서 최동원의 병역문제는 완전히 해결이 되었고, 따라서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아무런 걸림돌 없이 입단할 수 있게 됐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을 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 대해 당시 캐나다 한국일보 기자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한국 프로야구 흥행을 위해 야구 협회 등 각 단체 등이 나서서 최동원의 해외 진출을 방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기자에 의해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 씨가 얘기한 토론토의 새로운 제안 내용의 일부도 밝혀지는데 그 내용 중 핵심이 '완전한 MLB 계약'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류현진 선수나 윤석민 선수가 MLB에 진출하면서 계약서에 명시했다는 그 내용인 '마이너리그 거부권'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데, 1982년에 이런 조건의 계약 내용을 받은 한국 선수라는 것만 봐도 최동원이 어떤 선수였는지 실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토론토는 최동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83년 최동원과 롯데를 '계약 불이행'으로 법적인 문제로 비화시키려고 하지만 국가에서 나섰는지 (당시 군사 정권은 전두환이 까라면 까는 정권이었지요) 이 문제도 흐지부지 되며 최동원은 결국 MLB에 진출하지 못하게 됩니다.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1983년에 프로에 데뷔한 최동원.그의 프로 성적은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으니 혹사 부분 중심으로 짧게 정리하겠습니다.
최동원의 프로 첫해 성적은 9승 16패 4세이브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결과인데요, 기록을 자세히 보면 롯데 타선과 수비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8.2 이닝을 던지고 16차례 완투를 했으며 평균자책점이 2.89인데 9승 16패라는 성적은 당시 롯데의 타선과 수비가 문제가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1984년. 최동원은 무려 51경기에 나와 284.2이닝이라는 경기적이고도 엽기적인 혹사 기록을 남깁니다.
성적 또한 17승 13패 6세이브, 14완투에 2.40이라는 평균자책점으로 전성기 시절을 방불케 하는 기록을 남기며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혼자 거두게 되는 유명한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이 한국시리즈에서도 최동원은 1차전 완봉승, 3차전 완투승, 5차전 완투패 (3실점), 6차전 5이닝 구원승, 7차전 완투승이라는 단순히 '4승'이라는 숫자로 판단할 수 없는 엄청난 혹사를 당합니다.
여담으로 당시 롯데 감독이 강병철 감독이었는데 이후 롯데가 다시 우승했던 1992년 때 감독 역시 강병철 감독이었는데, 롯데 자이언츠 역사상 단 두 번의 우승 당시 감독이 모두 강병철 감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번 모두 최동원-염종석이라는 에이스가 희생 혹은 혹사 당한 것을 봤을 때 '롯데 우승=강병철 감독=특정 투수 혹사'라는 공식이 꽤나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강병철 감독이 의도했던 것이든 아니든 말이죠.
그리고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최동원은 여전한 혹사를 당하지만 이름 값에 어울리는 위력을 보여줍니다. 연도순으로 42경기, 225이닝, 14완투, 평균자책점 1.92- 39경기, 267이닝, 17완투, 평균자책점 1.55- 32경기, 224이닝, 15완투, 평균자책점 2.81이라는 기록인데요.
이 기록을 볼 때마다 과연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대단해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합니다.
이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순철 現 SBS 스포츠 해설위원이 1985년 신인으로 데뷔, 처음으로 최동원과 대결하러 타석에 들어갈 때였습니다.
타석에 들어가기 전 덕 아웃에서 해태 선배들이 최동원에 대해 '저 형 갔다'라고 하길래 마음 편하게 타석에 섰는데 공이 눈 높이로 오다 무릎 밑까지 뚝 떨어지는 커브에 삼진을 당하고는 덕아웃으로 들어가 '가긴 뭐가 간 거야'라고 해태 선배들에게 따졌더니 '저게 느려진 거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현재 삼성 라이온즈 류중일 감독도 같은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요.
갓 데뷔한 신인들의 눈에는 엄청난 변화구마저 최동원과 함께 선수생활을 보냈던 선수들의 눈에는 '이미 한 물간' 투구였다는 것을 보면 최동원이란 투수가 던지는 공이 얼마나 위력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1988년부터는 그 동안 혹사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고등학교-대학교-실업-프로를 거치며 국내 경기든 국제 대회든 나가는 경기마다 혹사를 당했던 최동원은 1988년 100이닝에도 못 미치는 83.1이닝 밖에 던지지 못합니다.
물론 2.0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16경기 밖에 등판하지 못한 것을 보면 언제나 영원할 것 같던 그의 '무쇠 팔'도 고장 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1988년에 최동원과 한국 프로야구에 결정적인 사건이 생겨 나는데 바로 '선수협'입니다.
같은 해 7월 부산일보 노조가 '편집권 독립'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자 성금을 낼 정도로 소신이 뚜렷했던 최동원은 다음 달인 8월 해태의 투수 김대현이 고통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선수협 결성을 추진하게 됩니다.
당시 최동원은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명예욕에 따른 움직임이라는 일부의 편견에 대해서는 “나는 1억 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그 돈이면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선수협을 결성할 필요가 없었다. 어려운 동료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위키백과)
하지만 당시 국내 기업 인식 수준이 '선수협=노조'였고, 노조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대기업들은 선수협 선수들에 대한 재계약 불가방침을 확정 지었으며 뒤로는 선수들을 개별 접촉하여 어르고 달래면서 회유하는 바람에 많은 선수들이 선수협을 이탈하였고 선수협은 유명무실해집니다.
그리고 최동원은 직격탄을 맞게 되는데 바로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것이지요.
롯데와 삼성은 최동원, 오명록 (투수), 김성현 (포수) vs 김시진, 전용권 (투수), 오대석 (내야수), 허규옥 (외야수)의 3:4 트레이드를 했는데 단 한 번도 롯데 유니폼 외의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최동원은 그야 말로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선수협 관련해서 지금도 그가 거만해서 동료선수들의 질시의 대상이 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1988년 9월 13일 선수협 창립총회에서 142명의 선수들이 모여 7명이 입후보한 가운데 최동원이 56표를 얻어 회장에 선출된 것을 보면 오해임이 분명합니다.
참고로 이 때 선수협 자문을 맡았던 사람이 문재인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아무튼 롯데는 실업시절 최동원과 계약할 때 계약금 문제로 뒤통수를 치더니 이번에도 최동원을 배신한 것이고, 최동원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먼저 손을 내민 적이 없습니다.
훗날 2009년 7월 4일 최동원이 롯데 유니폼을 입고 사직구장에서 시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도 롯데 구단이 주최한 게 아니라 당시 프로야구 스폰서였던 '마구마구'에서 준비한 이벤트였습니다.
결국 최동원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의 등 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을 하는 등 잠시나마 전시행정을 보여주긴 하지만 롯데는 그런 구단입니다.
어느 방송에서 봤는데 부산 야구의 인기는 바로 최동원이라는 얘기를 듣고 큰 공감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롯데의 인기는 최동원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심지어 어떤 야구 팬은 ‘부산은 최동원을 낳았고, 최동원은 부산팬을 낳았다’고 할 정도 부산 야구는 최동원과 동의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튼 삼성으로 트레이든 된 첫 시즌인 1989년 최동원은 전반기를 통째로 쉬게 됩니다.
선수협 문제와 트레이드 문제로 마음이 상해 동계 훈련도 제대로 못한 데다 그 동안의 혹사로 어깨에 탈이 나서 재활이 필요했기 때문인데요, 그 때문에 그 해의 성적은 8경기에 등판해서 30이닝을 던졌을 뿐입니다.
그 때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얘기가 '최동원은 끝났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음 시즌 (1990년)에도 부진하다면 천하의 최동원도 어쩔 수 없다는 얘기였지요.
예상대로 최동원은 1990년 시즌 22 경기 등판, 92이닝 투구, 6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5.28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남겼고 그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하게 됩니다.
최동원이 프로에서 활약한 기간이 8년 밖에 되질 않고 그 중에서도 마지막 2년은 삼성에서 부진했으며 롯데에서의 마지막 해도 이름 값을 못했기 때문에 프로 성적만 놓고 보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최동원을 폄하합니다.
하지만, 앞서 얘기해 온 그의 긴 아마시절과 프로에서의 연이은 혹사를 생각하면, 그 때문에 프로에 진출했을 때 이미 최동원의 전성기가 지났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최동원은 기록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갖고 있는 진정한 야구 선수이자 투수라는 생각을 합니다.
더구나 그가 던진 통산 1,414.2 이닝 중 1,208이닝이 입단 해부터 5년 동안의 기록이며 (1984년 한국시리즈 40이닝까지 합하게 되면 1,248이닝) 1984년~1986년까지 롯데가 치른 318경기 중 무려 41.5%인 132 경기에 등판했습니다.
따라서 1승-1무-1패를 기록하며 무승부를 이뤘던 선동렬과의 대결도 최동원이 전성기에 만났다면 선동렬은 상대가 되질 않았을 겁니다. 선동렬 조차 하일성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주간 야구. 1988.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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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 일본 프로야구에 가면 몇 승이나 할 것 같으냐?선동열: 10승은 자신 있고요. 그 다음은 잘 모르겠어요. 86년에 한큐의 카지모토씨가 왔을 때 10승은 너끈히 할 거라고 하대요.
하일성: 미국에 가면?선동열: 메이저리그는 꿈도 못 꾸고 트리플에이(AAA)쯤에서 뛰겠죠.
하일성: 언제까지 지금같이 던질 수 있을 것 같으냐?선동열: 3년쯤은 던지겠죠. 그런 것 보면 동원이 형은 굉장한 투수에요. 앞으로 그런 투수는 태어나기 힘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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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동원은 1년 정도 더 마운드에 설 수 있었습니다.
1991년부터 삼성의 감독으로 부임한 김성근 現 고양 원더스 감독이 '1년만 더 해보자'고 했지만 이미 은퇴를 결정한 상황에서 최동원은 그 제안을 뿌리치고 은퇴를 하게 되는데요, 언제나 최고로 살아왔고 최고로 던져왔던 최동원이기에 패전 처리로 등판하게 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마음의 상처가 꽤 깊었던 듯 합니다.
그가 죽고 난 뒤 김봉연은 최동원이 은퇴 후 가끔씩 찾아와 만나곤 했는데 보내는데 돌아갈 때 그의 뒷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혼자 울었던 적이 있다며 "최고의 선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지도자로서 그 명성에 미치지 못해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나도 겪어봐서 안다. 야인으로 긴 시간을 보내며 겪는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도 한 것을 보면 최동원이 마운드를 떠난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에 대해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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