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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읽어주는 남자: 낫 아웃!

불멸의 투수 최동원 (1): 언제나 나의 영웅

by 알킴 202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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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존칭 생략)

 

1982년, 그러니까 프로야구 원년부터 타이거즈 팬이지만 제 기억과 마음 속에 언제나 최고로 남아 있는 투수는최동원이었고, 최동원이며 앞으로도 최동원일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두었다거나 매년 200이닝을 넘게 던져서라든가 등의 이유는 아닙니다.

 

뭐 물론 그런 것들도 이유가 될 수 있긴 하겠지만 제가 그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타석에 그 누가 나오든 칠 테면 쳐보라는 마운드에서의 압도적인 자신감, 팀을 위한 엄청난 희생 정신 그리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함 등 때문인데요 어찌 보면 '선수 최동원'이 아닌 '사람 최동원'이 저에겐 더 영웅이라는 생각도 해보곤 합니다.

 

그래서 영웅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에 대한 자료를 이 잡듯이 뒤져서 꽤나 많이 모았고 그 내용들을 토대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내용들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 글을 써 봅니다.

 

어찌 보면 꽤나 긴 글이 될 최동원에 대한 이야기는 쓰기는 제가 쓰지만 다른 분들이 쓴 글을 토대로 종합한 것이며 마지막 편에 출처를 한 번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최동원은 원래 축구를 먼저 시작했습니다.

 

1958년 생,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그 유명하다는 58년 개띠인 최동원이 어린 시절에는 장비가 많이 필요한 야구보다는 축구가 어린이들에게 훨씬 접근하기 쉬웠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공 하나하고 운동장에 설치된 골대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가 운동을 시작한 이유가 좀 재미있는 것이 '다이어트'라는 것입니다.

 

운동보다는 공부에 더 소질이 많았던 최동원은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이미 45kg을 넘어서 학교에서 '돼지'라고 놀림을 받았고 그 별명이 싫어 운동을 했고 그것이 축구였습니다.

 

하지만 축구를 하면서도 야구에 흥미를 보였던 최동원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전근한 구덕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고 마침 그 학교에 있던 야구부에 가입하면서 그의 야구 인생이 시작 되었는데 그 때가 초등학교 6학년 때라고 합니다.

 

하지만 운동이 너무나 힘들다고 생각한 할머니의 반대로 가족 회의까지 열어 찬성 3표 (부모님과 할아버지), 반대 1표 (할머니)로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그는 할머니의 걱정에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겠다"라고 할머니에게 약속을 합니다. 물론 이 약속은 먼 훗날 타의 (롯데 자이언츠 구단)에 의해 깨지게 되고요.

 

 

 

그렇게 가족 회의가 결론 나자 최동원의 아버지 (故 최윤식 씨)는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도록 그를 지원합니다.

 

바로 먼 훗날 '아버지가 최동원을 망쳤다'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최동원의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사실과 많이 다르게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6.25 상이용사로 의족을 하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2008년 최동원 선수의 인터뷰를 보면 밤에 최동원의 뒷바라지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의족을 벗으시면 다리에 절단된 부분이 벌겋게 퉁퉁 부어있고 그 다리를 뜨거운 물로 마사지 하시면서 혼자서 우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란 최동원은 그저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의사결정 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최동원의 의견을 물어보고 서로 의견이 일치할 때만 외부에 언급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는 당사자다. 당사자가 욕을 먹으면 치명적이다. 욕먹을 일은 모두 내가 맡겠다. 너는 내 뒤에 숨어라.’라고 하면서 아들 최동원을 보호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동차가 귀하던 그 시절 언제나 최동원을 경기장으로 태워주고 집까지 데려오면서 피로가 조금이라도 덜 쌓이게 할 정도였다고 하니 집안의 장손인 최동원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대단했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얘기한 것처럼 아버지 때문에 최동원의 인생이 망쳤다는 얘기는 허튼 소리일 뿐이고요.

 

 

 

아무튼 본격적인 지원에 나선 아버지는 집 뒤 공터에 투구 연습장 같은 것을 만들어 줍니다.

 

아버지는 손수 담벼락에 100와트짜리 전구 600개를 매달아 야간에도 훈련을 할 수 있게 하였으며  밭을 다져 정식 구장과 같은 규모의 마운드를 만들고는 천막을 잘라 스트라이크 존을 그렸고, 처마의 빗물 받이를 떼서 야구공 굴리는 길을 만들었는데 최동원은 토성중학교(현 경남중학교)에 진학한 후부터 그 전용 연습장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와 함께 야간훈련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부산에 일본 방송이 잡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서는 일본 야구 중계를 볼 수 있었는데요, 그의 아버지는 그런 점을 십분 활용하여 일본 방송을 통해 야구를 보고 해설자들의 얘기를 꼼꼼하게 메모하고 30분 동안 그 내용을 아들에게 일러주고, 함께 연습장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공'을 정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던지게 했으면 보통 200개 이상을 매일 던졌는데 최동원의 동생 최수원 심판위원의 얘기에 의하면 많은 날은 300~400개도 던졌던 것 같다"고 합니다.

 

그의 연습은 30개 정도 던지면 동생들이 그 공을 주워 빗물 받이로 굴리면 아버지는 그 공을 받아 소쿠리에 담고, 그 사이 잠시 휴식을 취한 최동원은 다시 공을 던지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졌고 찢어진 천막을 꿰매는 건 할머니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날 때 쯤 어머니는 훈련을 마친 아들이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연탄불에 물을 데웠고 최동원이 씻는 동안 아버지는 혹시나 솜이 뭉쳐 아들이 잠을 편히 못 자거나, 근육에 무리가 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아들의 이불을 고르게 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 최동원만의 독특한 투구 폼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아버지가 최동원의 구속을 올리기 위해 다이내믹한 투구 폼을 연습시킨 것인데요, 최동원 선수의 인터뷰를 보면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당시 나는 삼총사로 불리던 용남이 (김용남)이나 시진이 (김시진)에 비해 작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원심력을 최대한 이용하고 중심이동도 효과적으로 해서 마지막 순간 손 끝에서 '방'하고 임팩트있게 힘을 발산할 것인가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만들어 낸 작품이다"

결국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처절한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그의 투구폼인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큰 투구 폼 때문에 하체가 흔들리자 아버지는 '차 끌기' 훈련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고등학생이 된 최동원은 아버지가 손수 다듬은 타이어를 몸에 끼우고 타이어에 매단 중형 승용차를 끌고 10도~15도 경사의 언덕길을 올랐고

 

그 덕에 허벅지가 굵어졌으며 투구 폼에 안정감이 생긴 것인데요,

 

정말로 온 가족의 지원을 받으며 훈련한 최동원은 고등학교 시절 드디어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 다음 편 보러 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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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http://sports.media.daum.net/sports/baseball/newsview?newsId=20110926114125159 등

   (마지막 편에 한 번에 공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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