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사라졌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제목처럼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내용이 아닌, 정말로 숭례문이 없어졌다. 자고 일어나보니 스타가 된 게 아니라 자고 일어나보니 숭례문이 없어진 것이다.
지금은 시장으로 더 유명한 남대문. 대한민국 국보 1호이면서도 마치 외딴 섬인양 홀로 뚝 떨어져 서울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건축물. 동대문과 함께 긴 세월 동안의 서울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그 남대문을 자세히 보면 ‘崇禮門 (숭례문)’이라는 큰 현판이 걸려있었다.
벌써 수 십 년을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도대체 현판에 써 있는 저 글씨는 누가 썼을까 이따끔씩 궁금해하기도 했던 그 현판.
양녕대군. 세종대왕의 맏형이자 태종 이방원의 큰 아들.
우리가-사실 ‘우리’라고 하기엔 약간 부담이 있다. 요즘은 어떻게 배우는지 모르니까- 어릴 때 배웠던 역사 속의 양녕대군은 정신병자의 기운이 있어 궁녀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주색 잡기에 여념이 없는 이른바 '한량'으로, 당시 국왕이었던 태종은 장남인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위하고 왕위를 삼남인 충녕대군, 즉 세종대왕에게 넘긴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대한민국 역사 왜곡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역사라는 것이 승리자의 기록이요 패배하는 순간 모든 기록은 사라지거나 왜곡되기 마련인데, 양녕대군 역시 그러한 피해를 가장 크게 본 역사적 인물 중 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시와 그림, 그리고 글씨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면서도 풍류를 좋아하고 즐겼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왕권 차지를 위한 형제간의 암투와 살육, 그리고 왕권 차지 이후에 부인-양녕대군의 어머니-보다는 수 많은 궁녀들와 운우지락을 보내는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왕이 되기보다는 사회적 신분을 떠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기방을 찾아 술과 함께 시와 그림을 논하던 시대의 풍운아였다.
이러한 그가 남긴 수 많은 글씨와 그림 중이 단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쓸쓸히 국보 1호인 남대문을 지키고 있는 숭례문 현판이었는데 그 숭례문이 없어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모두가 동의하다시피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역사적 인물들이 있는데 양녕 대군이 바로 그 인물들 중 한 명이다.
만약 그가 심약한 성격을 버리고 왕권에 욕심을 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어쩌면 그가 권력 욕을 버렸던 것이 21세기의 우리에게는 득이 되었던 것일까.
여기서 질문하나. 장남인 양녕대군이 세자 지위를 박탈 당했으면 차남인 효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어야 하는데 왜 삼남인 충녕대군 (세종대왕)이 세자가 되었을까? 정답은 이 책에 나와 있다. 참고로 그는 스스로 스님이 되었다.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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