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쓰잘데기 없는 얘기긴 한데, 일상 생활에서도 그렇고 방송에서도 그렇고 ‘이 놈, 저 놈’이라는 말은 아무 문제없이 사용하는데 ‘이 년, 저 년’이라는 말은 쉽게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알기론 ‘놈’은 남자를 낮춰 부르는 비속어이고 ‘년’은 여자를 낮춰 부르는 비속어인데, 남자를 낮춰 부르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통용이 되면서 여자를 낮춰 부르는 단어는 통용이 안 되는 게 살짝 이해가 안 가긴 합니다.
이렇게 제가 쓰잘데기 없는 얘기를 풀어 놓는 이유는 영화 [그놈이다]의 감상 후기를 어떻게 시작할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어서입니다.
감독 얘기로 시작할까, 배우 얘기로 시작할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바로 영화 얘기로 시작할까 다양한 고민을 했지만 딱히 뭔가 손에 잡히질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영화 제목을 갖고 시작해볼까라는 생각으로 꺼내든 화두가 영화와는 크게 상관없는 얘기긴 한데 사실 궁금하긴 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여자라면 ‘그년이다’라고 제목을 할 수 있을지.
2015년,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고 나선 영화 [그놈이다]는 부산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1999년 부산 청사포 해변마을에서 어느 여대생이 해변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그 여학생의 아버지는 범인을 잡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였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던 사건인데요, 영화에서는 여대생을 여고생으로 아빠를 오빠로 변경하여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은 거라곤 오래된 집 한 채와 여동생 은지 (류혜영)뿐인 장우 (주원)는 자신에게 남은 이 두 가지를 끔찍이도 아낍니다.
그래서 동네가 재개발을 하려는데 혼자만 반대해서 알박기 아닌 알박기를 하는가 하면, 은지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며 오로지 은지의 뒷바라지를 위해 힘든 공장 일을 하며 살아 가는데요.
은지는 공부보다는 미용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의 제사 때문에 일찍 들어오라고 했음에도 귀가 하지 않은 은지는 3일 후 자신의 공장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대부분의 실종 사건이-어떤 통계에서는 무려 80%라고 하더군요- 단순 가출이기 때문에 형사는 3일만 기다려 보자고 했는데 그 사이에 은지는 시체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경찰의 수사는 전혀 진전을 보이지 않았고 이에 동생을 잃은 슬픔과 분노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범인을 잡는 것에 몰두하는 장우의 얘기가 진행됩니다.
특히- 실제 청사포 사건에서도 발생한 일이긴 한데-죽은 은지를 위한 천도제를 지내는 과정에서 죽은 넋을 위로하기 위해 바다에 던진 쌀을 담은 놋그릇을 묶은 끈이 끊어지고 그 놋그릇이 바닷가 바위 위에 서 있던 정체 모를 남자를 향해 떠내려 갑니다.
그리고 장면을 목격한 후 장우는 오직 그 남자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찾기에 혈안이 됩니다.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살인범이 약사 (유해진)라는 것을 처음부터 눈치 채도록 합니다.
현장에 있었던 신발 자국과 똑 같은 밑창을 가진 신발이 약사의 집에 있는가 하면, 동네 골목길에서 우연히 천도제 현장에 있었던 남자를 발견한 장우가 쫓아가는 과정에서 갑자기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진 것과 동시에 비어있던 약국의 불이 들어오는 등 모든 것이 약사가 범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중간에 장우의 먼 친척 뻘인 명규 (이준혁)가 범인인 척 트릭을 내세우지만 누가 봐도 그는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혀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가 아닌 범인이 누구인지를 미리 밝혀 놓고 ‘왜’ 그가 범인인지를 증명하는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다소 위험이 따르는 방법인 것이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가는 과정을 그리는 이야기 전개에서는 그 구성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관객이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이 영화가 택한 방식은 구성이 치밀하지 않으면 ‘저게 뭐야?’라는 실망감을 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독은 여기에 독특한 인물을 내세우는데 바로 누군가가 죽는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인물인 시은 (이유영)입니다.
그녀의 이런 독특한 능력 (?) 덕분에 동네 사람들로부터 재수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그녀는 출연 분량에 비해 이 영화의 핵심 인물로 감독이 설정한 듯 보입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Fatal intuition]입니다.
해석하면 ‘죽음을 초래하는 또는 치명적인 직관력’이란 뜻인데 바로 시은이 가진 능력을 뜻하는 것인데요, 반면에 아니러니 하게도 이 영화에서 시은이 없더라도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화 전체에서 시은의 역할을 쏙 빼고 보더라도 등장인물이 죽고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큰 이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다만 극적인 긴장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할 뿐이죠.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바로 시은이 약사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순간에 장우가 구해주고 함께 경찰서로 가서 그 과정을 진술하는 장면에서 경찰에게 ‘그런 일은 없었다’, 즉 약사에게 죽음을 당할 뻔한 일은 없었다라고 거짓 진술을 하는 장면인데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언뜻 장우의 죽음이 보였기 때문에 장우로 하여금 더 이상 약사를 추적하는 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장우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약사가 범인이라고 그 자리에서 신고하는 게 더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경찰에 잡혀야 나중에 일어날 살인 사건을 예방할 수 있으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영화는 시은이의 행동을 어떻게든 설명을 해주었어야 하는데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음에도 당최 시은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가 다소 부담스러웠습니다.
이 외에도 이 영화는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이해하기 어렵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 연출이 있는데요, 우선 범인이 죽은 은지의 전화로 장우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동생을 죽인 범인만 찾아 다니는 장우에게 범인은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가 노출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죽은 동생의 전화기를 사용해서 전화를 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그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지막에 장우가 약사를 껴 안고 창 밖으로 떨어지는 과정에서 약사는 땅바닥에 떨어져 죽지만 장우는 팔이 담장에 걸려 목숨을 건지는데, 창 밖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봐서는 상식적으로 장우의 팔이 그렇게 담장에 걸릴 수가 없습니다.
줄여서 말하면 너무나 비현실 적이죠.
감독이 영화를 마무리 하면서 권선징악을 의식해서인지 범인은 죽이고 주인공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너무 강하게 해서 만든 장면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현실감이 너무 떨어져 실소를 불러 일으킬 뿐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이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린 가장 강력한 (?) 요소는 바로 주연 배우인 주원과 류혜영의 어설픈 사투리 연기였습니다.
사투리 연기가 서투르다 못해 서울말과 부산 사투리를 섞어 쓰는 장면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고, 그 때마다 몰입감이 확확 떨어졌는데 촬영 전에 사투리 대사를 좀 더 완벽하게 익혔어야 하지 않았다 싶네요.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이 영화의 관객수는 1,046,313명에 그쳤습니다.
개봉 전에 불러모았던 기대감에 비해서는 상당히 아쉬운 흥행 성적표인데요, 아무래도 곳곳에서 이런 아쉬운 장면들이 있어서는 아닐까, 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반면 약사라는 인물의 설정은 탁월했다고 보여집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병에 걸려 집안에 누워만 있자 새엄마로 추정되는 여자가 젊은 남자를 집안으로 끌어들여 불륜을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동생까지 죽인 것에 충격을 받은 약사는 새 엄마와 불륜남을 죽이게 됩니다.
이후에도 약사는 뭔가 헤퍼 보이는 여자를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영화 초반부에서 은지의 설정이 교복 치마를 짧게 입고 다닌 것이어서 약사에게는 헤퍼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살해한 동네 아줌마도 약사 앞에서 속옷을 보이는 등 끼를 부린 모습이 약사에게는 어린 시절 새엄마를 떠올리게 했던 것입니다.
특히 이미 범인이 약사라는 것을 관객에게 노출시킨 상황에서 ‘진짜로 약사가 범인일까?’라는 의문을 심어주기 위해 병원의 독거 노인들을 찾아가 봉사를 하면 장면을 연출한 것들은 관객들이 믿음을 확신으로 바꾸는데 주저하도록 하는 절묘한 장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분들이 약사가 '사이코 패스'라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장면들 때문에 사이코 패스 보다는 소시오 패스가 더 맞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영화 vs 영화 (30): 추격자 vs 오피스 - 우리가 사이코 패스를 알아야 하는 이유'라는 포스팅 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이코 패스와 소시오 패스의 가장 큰 차이점인 ‘타인과의 공감 능력’인데, ‘약사’라는 성공한 신분이라는 것과 그런 신분을 잘 이용했다는 점,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는 등 평상 시에는 다른 동네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는 점 등이 소시오 패스에 더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 ' 영화 vs 영화 (30): 추격자 vs 오피스 - 우리가 사이코 패스를 알아야 하는 이유' 보러 가기
이처럼 곳곳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좋은 점도 있었던 영화 [그놈이다].
다음 작품에서는 윤준형 감독의 더욱 멋진 연출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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