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는 최악의 경우 3류 포르노 제작회사를 다룬 소설이거나 잘 해봐야 통속소설 정도일 거란 생각을 했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주는 편견에다 제목이 주는 기운까지 더해져 사람을 극락, 다른 말로 쾌락으로 보내주는 뭐 그런 내용의 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작가의 이름을 보니 ‘하라 고이치’, [달려라 얏상]의 저자였다.
전업 작가인 줄은 몰랐는데 다른 책을 또 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아, 이 작가라면 믿고 볼만하지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만큼 [달려라 얏상]은 꽤나 일어볼 만한 책이었다.
사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직까지 정년 퇴직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실감은 나질 않는다.
엄청난 해방감을 주는 것일지 아니면 상당한 상실감을 주는 것일지 직접적인 경험을 하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최근 경험해 본 짧은 듯 짧지 않은 짧은 것 같은 백수 생활을 통해 그나마 추측이라도 해본다면 일단 ‘지루하다’라는 것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복적이고 기계적으로 행해지는 것들이 일순간에 사라지면서
처음에는 해방감으로 온 몸이 젖지만 조금만 지나면 넘쳐나는 자유 시간으로 지루해진다.
개인적으로 은퇴 후에는 뭘 할지 생각해 둔 건 있지만 이렇듯 백수기간에는 뭘 해야 할지 생각해 둔 게 없으니 지루할 뿐이어서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상실감으로부터 오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을 정년 퇴직에 대입해 보면 퇴직 후에 무엇을 할지 미리 생각해 두지 않으면
너무나 많아진 시간에 상실감이 올 수도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특히나 한 사회의 고도 성장기를 이끌며 ‘평생 직장’의 개념으로 회사를 다녔던 세대의 남자들에게
정년 퇴직이란 어쩌면 정신적인 사형 선고나 다름 없을지도 모른다.
정년 퇴직 후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스고우치와 기리미네 두 사람은 퇴직 후 할 일이 없어 이리저리 방황을 하다 도서관에 정착 (?)한 사람들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2차 대전 이후 일본 경제의 흥망성쇠를 몸소 경험한 이를 테면 ‘베이비 붐 세대’, 혹은 ‘평생 직장 세대’,
또 다른 말로는 ‘회사에 죽고 회사는 살았던 세대’ 쯤으로 불리던 세대라는 점인데
그렇다 보니 그들의 모든 것인 회사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상실감이 컸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가짜 회사, 이른바 모조 (모조품 할 때의 모조) 회사를 만들기로 한다.
실물 (취급하는 물건)과 돈 (자본금)이 없다는 것만 빼면 출근과 퇴근, 야근과 외근 등 실제 회사와 똑 같은 생활을 하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동네에 장사가 잘 안 되는 카페를 임대해 사무실로 꾸미고 자신들과 같은 상황인 퇴직자를 사원으로 뽑기 위해 광고를 내는데,
이게 웬일, 엄청난 지원자가 몰려들어 직원을 뽑기 힘들어 지사까지 만드는가 하면
다른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비슷한 모조회사들이 생기기까지 하는 등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사실 사람이 규칙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익숙하다는 것이고
익숙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연스럽다는 것이며 무의식적으로도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고문하는 방법 중의 한 가지는 ‘익숙한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정년 퇴직한 사람들, 특히 내 회사라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에게 정년 퇴직이란 그처럼 익숙한 것을 빼앗는 것과 다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스고우치가 시작한 모조회사가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소설이지만 쉽게 공감이 가고 이야기 전개에 거부감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생활이 염증이 난 스고우치의 아들 신페이는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어차피 열심히 사는 거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회사를 하면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고객사 중 청소대행업으로 성공한 니티니 사장은 술 자리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신이 돈을 댈 테니 사업을 해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하고 그 제안에 솔깃해진 신페이는 아버지로부터 촉발된 정년 퇴직자들을 활용한 실버 산업에 대한 계획서를 니타니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그 사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모조 회사의 운영 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기에 아버지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자신을 비롯한 모조 회사 사람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화가 난 아버지는 자세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찾아간 모조회사의 공동창업자이자 경쟁사의 사장 역할을 하는 기리미네 역시 정보 제공에 비협조적으로 나와
신페이의 사업은 기약 없이 미뤄지고 그 사이 니타니의 사업은 자금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자 니타이는 신페이로부터 사업 아이디를 듣고 괜찮게 생각하고 있던 기리미네에게 접근해서 동업제의를 했고,
기리미네는 처음 모조회사를 설립했던 취지를 망각한 채 니타니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니타니는 프랜차이즈 가맹 비용을 받아 챙기고는 잠적하고
그 때문에 기리미네를 비롯한 스고우치 및 모조회사가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된다.
(자세한 줄거리는 책 참조 바람)
결국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듯하다.
처음 ‘주식회사 놀이’라는 모조 회사를 설립할 때의 창업이념이 ‘ 꿈 속의 이상, 고지식함, 도외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돈과 사업아이디어를 만나게 되자 기리미네는 모조 회사가 아닌 진짜 회사를 하고 싶어진 것이다.
물론 기리미네의 과거가 그의 심리에 어떤 식으로든 작용했을 수도 있다.
동경대 출신의 엘리트로 잘나가던 시절 그는 성공을 위해 회사 임원의 딸과 정략 결혼을 했지만 어차피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외도를 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에게 이혼을 당했다.
그 후 승승장구하던 회사 내 입지는 한풀 꺾여-당시 일본에서는 이혼을 하게 되면 회사 내에서 안 좋게 인식되는 분위기였던 듯 하다-
평범한 회사 생활을 하게 된 기리미네는 모조회사가 아닌 실제 회사 운영을 통해 그런 정신적인 콤플렉스를 극복하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됐든 그것도 욕심은 욕심이니까. 철저히 개인적인 욕심.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하길 바라며 힌트를 준다면 신페이는 어머니와 아내의 도움을 받아
또 다른 사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라는 내용으로 책은 마무리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업의 가장 핵심 역할을 할 사람은 바로 정년퇴직자 스고우친데,
그런 면에서 보면 작가도 회사 생활을 했던 사람인지라 나이 많은 사람의 ‘경험’을 꽤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듯 하다.
최근 들어 회사들을 보면 나이 많은 사람들의 경험 혹은 연륜보다는 젊은 사람들의 열정 혹은 체력을 중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나이 많은 사람들도 꼰대 의식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젊은 사람들과 어울린다거나 높은 연봉을 깎는다거나 하는 등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지만 경험과 지식과 연륜이 없는 젊은 사람들로만 회사가 구성 된다면
그만큼 업무의 산출물도 떨어지고 그런 회사들이 모인 산업은 그 산업 자체의 수준이 떨어지게 된다.
순간적이고 감각적이고 새로운 것만은 추구하다 보면 가장 뼈대가 되고 중심이 되는 것에 대한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라는 정도로 이 책을 읽은 소감을 마무리 하려 한다.
참고로 이 책은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부분이 곳곳에 있어서 읽기에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으며,
작가가 어느 정도 사업과 마케팅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인지 그런 쪽과 관련된 현학적 모습이 군데군데 등장하는 안타까운 점도 있음을 밝혀 둔다.
그러니까 [달려라 얏상] 보다는 어느 정도 완성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그런대로 읽어볼 만한 책,
다 읽고서 우리 사회에 대해 한번은 더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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