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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읽어주는 남자: 낫 아웃!

역대 최고 포수 열전!- 박경완 (1)

by 알킴 2014.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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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 특집으로 오랜만에 포스팅을 합니다. 어느덧 다섯번 째 이기도 하네요.

좀 더 좋은 포수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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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최초 4연타석 홈런
  • 대한민국 포수 최고 20-20 클럽 가입
  • 대한민국 포수 최초 300 홈런
  • 그리고 경기 출전 수 대비 도루 저지율 1.

 

바로 작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박경완 SK 2군 감독의 기록입니다.

(편의상 존칭 생략)

 

원래 박경완은 군산 금광 초등학교 야구부에서 포수로 시작, 6학년 때 전주 중앙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영혼의 배터리'라고 불리는 김원형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전주 동중학교, 전주 고등학교를 거치는 내내 포수를 맡으며 김원형과 배터리를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김원형이 쌍방울과 고려대가 서로 데려가기 위해 치열한 영입전을 펼친 것과는 반대로 박경완은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프로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포수로써의 수비 능력이나 타격 등의 자질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인데요 그 때문에 신인지명을 받지 못했던 그는

원광대 진학을 하려고까지 했지만 그마저도 잘 안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쌍방울 최고의 유망주로 입단한 김원형의 도움으로 1990 12, 연봉 600만원이라는 금액에 신고선수로 쌍방울에 입단할 수 있었는데요,

당시 구단에서 김원형과 함께 운동도 하고 말동무도 해주라는 의미에서 박경완을 입단시켰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믿기지 않는 박경완의 모습이네요.

 

 

1991년 데뷔 년도의 박경완의 성적은 6타수 무안타 6삼진이라는 처참한 기록 뿐입니다.

타석에는 두 번 정도 더 들어섰는지 볼넷 2개가 있네요.

92년과 93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출장 경기수가 각각 31경기, 26경기에 지나지 않고 타율도 2할 대 초반에 그치고 맙니다.

쉽게 얘기하면 말 그대로 백업포수였던 거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박경완은 국내 최고 포수로 성장하는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조범현 현 KT 감독과의 인연인데요, 조범현은 1992년 겨울 쌍방울 배터리 코치로 부임하게 됩니다.

 

사실 쌍방울이라는 기업 자체가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기에 무리가 있었던 회사임에도 7개 구단이라는 기형적인 운영을 막고

동시에 프로야구 흥행을 위해 억지춘향 격으로 8구단을 출범시킨 KBO 덕분에 쌍방울 레이더스는 늘 자금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코치진을 구성할 여력이 없었던 데다 더구나 제대로 된 포수 출신 지도자들이 없었기에

조범현의 부임 소식을 들은 박경완은 '드디어 제대로 배울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들떴었다고 합니다.

조범현 역시 박경완을 처음 보고 체격 조건이나 여러 가지가 대형 포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은 따로 있는 듯 합니다.

 

 

 

어찌 됐든, 박경완을 제대로 다듬어 보기로 작정한 조범현은 박경완의 집 근처로 이사까지 가서는 그를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포수 수비의 기본이 되는 블로킹을 위해 하루에 700개 이상의 펑고는 기본이었고 심할 때는 1,000개까지도 했다고 합니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 공 받다가 쓰러져도 공이 계속 날아와 온 몸에 맞을 정도였는데  한번은 훈련하다

조 감독에게 대놓고 차라리 날 죽여!’라고 욕한 적도 있다고 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매번 훈련 마치면 거의 운동장에서 쓰러지기 일수였는데 심지어 거기서 그대로 잠들 정도였는데

그러면 매번 조범현 코치가 쪼르르 와서는 툭툭 치며 "죽었나?"하고 물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저녁만 되면 '차나 한 잔 하자'라는 전화 통화로 박경완을 공터로 불러내 기본기와 여러 가지 훈련을 시켰다고 할 정도니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힘든 시간을 버틴 덕분에 1994년 박경완은 드디어 팀의 주전 포수로 102경기에 출전하면서 단 6개의 실책만을 기록하게 됩니다.

타석에서는 여전히 2할 대 초반의 타율이었지만 홈런을 14개치고 31타점을 올릴 정도로 찬스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모습으로 성장했고

도루 저지율에서도 0.433을 기록하며 1위에 오르는 말 그대로 인생 역전을 써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투수리드 측면에서의 박경완은 투수들에게 아직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졸에다 신고 선수로 입단한 신참 포수의 리드를 대졸 출신 선배 투수들이 믿고 따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 일화가 하나 있는데 1995년 대구에서 삼성과 경기를 하다 8회말 역전타를 맞고 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박경완은 당시 투수 박진석에게 변화구를 던지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박진석이 직구를 끝까지 고집했고 그 결과가 역전 패였는데요

경기가 끝난 뒤 더그아웃 뒤쪽에서 난리가 났었습니다.

볼배합 문제로 화가 난 조범현이 이단옆차기까지 날리며 박경완을 심하게 꾸짖은 것인데

그날 박경완은 포수 장비를 한 채로 코치들이 나서서 가까스로 말렸을 정도로 엄청 맞았다고 합니다.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덕아웃 풍경이었는데 아마 요즘에 어떤 코치가 그런 식으로 선수를 대한다면

뉴스에 '폭력 코치'로 대서특필 될 사건이었습니다.

 

어쨌든 자기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조범현에게 혼난 박경완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조범현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졌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조범현은 투수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박경완을 때린 것이었다고 합니다.

투수가 포수가 낸 사인에 고개를 흔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왜 패전 책임을 어린 포수에게 넘기느냐,

조코치는 우회적으로 이런 뜻을 전달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그 사건 뒤 소신 있게 사인을 냈고 투수 선배들도 따라오기 시작했고

박경완이 던지라는 곳으로 던지니 이긴다는 믿음도 생겼다고 합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박경완을 만들기 위해 조범현은 투수 리드 쪽에서도 박경완을 혹독하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타자가 반응을 보인 공 배합을 무조건 기억하게 했고 기억하지 못하면 혹독한 훈련을 시켰는데요

그 덕분에 박경완은 각 타자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 타자에 맞는 공 배합을 효과적으로 투수에게 전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덕분인지 1996년에는 0.475라는 도루 저지율을 기록하며 그의 별명인 '포도대장'이 탄생하기도 했었습니다.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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