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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읽어주는 남자: 낫 아웃!

잊혀진 그 때 그 스타 (8). 박재홍- 첫 번째 이야기 (원조 30-30 클럽, 현대 유니콘스)

by Robin-Kim 2024.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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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뷔 첫해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한 선수
  • 통산 3번이나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한 선수
  • 국내 선수 중 유일하게 250홈런-250도루를 달성한 선수
  • 국내 선수 중 300홈런-300도루에 가장 근접했던 선수
  • 그리고 본인은 먹지도 않았던 '빵' 때문에 야구팬 사이에서 유명해진 선수

 

바로 '리틀 쿠바' 박재홍 현 MBC SPORTS+  (엠스플) 해설위원 (이하 선수 혹은 존칭 생략)입니다.

 

 

사실 박재홍 선수가 딱히 저 평가 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송진우, 양준혁, 이종범 선수만큼의 평가를 받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닌 듯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그들과 같은 '수퍼 레전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는 분명히 현재의 평가보다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선수였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일고를 졸업한 박재홍은 1992년 당시 해태 타이거즈가 지명권을 행사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연세대학교에 진학합니다.

 

그리고는 1994년 11월 창단한 실업팀인 현대 피닉스와 계약을 했고, 현대 피닉스는 1995년 9월 태평양을 인수하며1996년 프로에 본격 진출하였고 박재홍은 현대 피닉스와의 계약의 연장선상에 현대 유니콘스와 계약하게 됩니다.

 

이 때 그의 계약금과 연봉이 총 4억 5천 만원으로 역대 야수 최고 대우였다고 하는데 신인이 그토록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 과정에 문제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른 포스팅에서 자세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무튼 해태의 지명권을 거부하고 대학에 진학한 것이나 나중에 현대에 입단한 것을 두고 그토록 선수에 대한 애정이 깊은 광주 팬들은박재홍을 미워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광주로 원정 경기를 가면 광주 아저씨들이 그를 찾아가 욕을 한바탕 했을 정도라고 하네요.

 

그리고 해태는 어쩔 수 없이 최상덕과 지명권을 맞바꾸는 트레이드로 박재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기아로 트레이드 되었을 때도 이런저런 이유로 박재홍은 광주가 고향이고 광주일고를 졸업했음에도

광주에서 안티 팬이 더 많은 선수였습니다.

 

어쨌든 현대에 입단한 첫 해 김재박 감독은 원래 그를 2루수로 기용하려 했으나 수비에 만족하지 못했고, 내야 수비 연습을 혹독하게 시키는 대신 수비 부담이 적은 외야수로 기용하며 어느 정도 수비 부담을 줄여주었는데요.

 

그 덕분인지 박재홍은 데뷔 첫 해인 1996년 국내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30-30 클럽에 가입하게 됩니다 (30홈런-36도루).

 

사실 가입했다기 보다는 '포문을 열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당시 해태 이종범 선수가 25홈런 57도루를 기록하며 '역시 이종범'이란 말을 들었지만 30-30에 가입하지 못했는데, 신인이었던 박재홍이 역대 최초의 대 기록을 세웠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초반 몇 경기에는 부진을 겪으면서 '신인으로써의 한계'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5월 5일 부산에서 펼쳐진 롯데와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3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무섭게 치고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5월에만 10개의 홈런을 뽑아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승승장구 하던 박재홍은 6월 들어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당시 쌍방울 감독이던 김성근 감독의 '부정 타격' 지적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박재홍 선수의 타격 자세는 일반적으로 공을 끝까지 보기 위해서 타석의 뒤에 서는 다른 타자들과는 달리 타석의 앞 쪽에서 잔뜩 웅크린 것이었는데요.

 

이런 자세에서 타격 시 왼 발을 들었다 놓는 과정에서 타석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김성근 감독의 지적이었습니다.

 

당시 이 논란에 김응룡, 백인천 감독도 가세하여 야구계가 뜨거워졌는데, 그 덕에 박재홍은 6월 한 달간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이 그 때 박재홍을 흔들었던 김성근 감독과 박재홍은 SK에서 감독과 선수로 다시 만나게 되지요.

 

어쨌든 급격하게 페이스가 떨어졌던 박재홍은 7월 청주에서 홈런을 기록하며 20-20을 달성했고, 8월에 다시 조금 부진하다 9월 3일 잠실 LG전에서 LG의 전설 김용수를 상대로 30홈런을 달성하여 30-30이란 기록을 만들어 냅니다.

 

이른바 '호타 준족'의 대명사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기록은 2024년에 기아 타이거즈의 김도영 선수가 30-30을 당하기까지 최연소 기록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해 홈런왕, 타점왕 (108타점)과 함께 올스타 최다 득표의 영예를 얻었으며 신인으로써는 처음으로 신인왕과 글든 글러브를 수상하게 됩니다. 

 

신인으로서 박재홍의 이 기록이 더 대단한 이유는 그 해 초 앞서 얘기한 현대 피닉스와의 계약 문제로 전지훈련을 가지 못하고 개인훈련만으로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듬해인 1997년. 부상 때문에 불과 96경기에만 출전했음에도 0.326의 타율과 27홈런, 22도루, 69타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20-20을 달성했고, 1998년에는 0.266의 타율로 타율은 낮았지만 30홈런-43도루로 생애 두 번째이자 최초로 두 번째 30-30을 달성하게 됩니다.

 

말 그대로 장타도 잘 치고 잘 뛰기도 하는 대명사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해 현대 유니콘스는 창단 처음으로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대표 선수로 출전, 한국 야구의 첫 올림픽 동메달에 기여하더니 그 여세를 몰아 팀 우승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당시 그의 기록을 보면 타율 0.309, 안타 151개 (개인 최고 기록), 홈런 32개, 도루 30개, 115타점 (개인 최고 기록)을 기록했는데요, 전무후무한 세 번째 30-30달성과 함께 또 한 번의 우승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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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http://blog.naver.com/7179sjw?Redirect=Log&logNo=150168190706

- http://blog.naver.com/kyeongho51?Redirect=Log&logNo=60070260700

- http://cafe.naver.com/ilovebaseball090910/21596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newsid=20110416083307748&srchid=IIM%2Fnews%2F40769413%2Fc161e0f2dab626ee11062572a1b097ca#A20110416083307974.jpg&srchid=IIM/news/40769413/c161e0f2dab626ee11062572a1b097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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