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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읽어주는 남자: 낫 아웃!

역대 최고의 왼손 투수들 (5)- 송진우: 첫 번째

by Robin-Kim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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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생활 21년 동안 한 팀에서 생활하며 210승과 3003이닝 및 2,048 탈삼진을 기록한 위대한 투수.

 

좌우를 넘어 대한민국의 에이스로써 은퇴식을 보며 타이거즈 팬이었던 나를 눈물짓게 한 선수.다들 아시겠지만 송진우 선수 이야기 입니다.

 

 

1981년 세광고등학교 재학 당시 부상중인 상태에서도 황금 사자기 대회에서 학교가 우승을 차지하고, 이듬해 준 우승을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이름을 알립니다.

 

이때의 혹사로 대학에 진학하고도 (동국대학교) 3학년 때가지 마운드에 서지 못했으며, 심지어 2학년 때는 팔꿈치 수술까지 받게 됩니다. 하지만 타석에서는 150미터짜리 대형 홈런을 터뜨릴 정도로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4학년이 되어서야 다시 투수로 복귀하면서 마운드에서 재기를 하게 되는데요.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88년 서울 올림픽에 그를 출전시키기 위해 야구 협회에서 1년간 그의 프로 행을 유보시킬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데뷔한 프로무대. 1989년 현 한화의 전신인 빙그레에서 시작한 프로 첫 경기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면서 아직 까지 깨지지 않는 ‘프로 첫 경기 완봉승’이라는 기록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는 9승 10패 9세이브, 평균자책점 2.81의 준수한 성적으로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명불허전’임을 입증했습니다.

 

이후 1992년 까지 11승 7패, 11승 10패, 19승 8패를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군림하면서 1991년 한국시리즈 준우승,1992년 정규리그 1위 및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끌어 냅니다.

 

특히 1992년에는 17세이브까지 기록하면서 선발과 마무리 양쪽에서 에이스 역할을 했기에 소속팀 (당시 빙그레 이글스)이 정규 리그 1위를 차지 할 수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으로썬 상상할 수 없는 선수 혹사라는 어두운 단면이 있긴 합니다만.

 

1992년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얘기해보겠습니다.

 

과거 ‘아이러브 베이스 볼’에서 현재 KT 이강철 감독도 얘기한 내용이긴 하지만, 1992년에 이강철 투수와 송진우 투수는 다승왕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빙그레 이글의 정규리그 우승이 확정됐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 감독은 송진우 선수의 기록을 만들어주기 위해 5회 투아웃까지 앞서 있던 상황에서 선발투수 한희민을 송진우로 교체했으며, 송진우 선수는 1승과 1세이브 포인트를 추가하며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밀어주기 논란이 많았으며, 결국 MVP 후보에서도 제외되게 됩니다. 사실 김영덕 감독의 욕심이 과하긴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여파 때문인지 1993년 처음으로 100이닝을 소화하지 못하며 7승 7패 8세이브를 기록하며 다소 주춤하게 됩니다.

 

매년 10승 이상, 180이닝 이상, 삼진 100개 이상을 기록하던 투수의 성적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치였습니다. 이 때가 그의 첫 번째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야구에만 몰두하는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하는 송진우 선수는 이듬 해인 1994년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립니다. 

 

9승 10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3.92의 성적을 거두게 되는데요, 이 때까지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전천후 투구를 했던 때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발 10승 투수가 10세이브 이상을 기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송진우 선수는 그걸 매년 해왔고, 이후로는 2003년을 제외하고는 총 출장 경기에서 산발 출장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1995년과 1996년 13승과 15승을 거두며 완벽한 부활을 팬들에게 선사했습니다.

 

특히 부활이 시작된 1994년은 빙그레 이글스가 한화 이글스로 바뀐 해로, 송진우 선수는 어수선한 팀 분위기에서도 이름 값을 톡톡히 한 선수가 된 것이지요.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 두 번째 이야기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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