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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읽어주는 남자: 낫 아웃!

역대 최고의 왼손 투수들 (4)-이선희

by Robin-Kim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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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 100년사에 가장 큰 전환점을 기록한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렸던 1982년 3월 27일.

 

프로 통산 1호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고 같은 해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거짓말 같은 결정적인 만루홈런을 맞으며, 마운드에 주저앉아 통한의 눈물을 흘린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 바로 이선희 선수 입니다.                

 

 

 

아마 프로야구를 원년부터 보지 않았거나 나이가 어린 친구들은 이선희 선수에 대해 잘 모를 것입니다.

 

저도 1982년 프로야구에서부터 그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아마추어 때 실력이나 기록 등을 알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1982년 원년부터 1987년까지 총 6년 동안 첫 3년은 삼성에서, 나머지 3년은 MBC 청룡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이선희 선수는 당시에는 드문, 그래서 귀했던 왼손 투수였습니다.

 

사실 그가 왜 단 6년 동안만 프로 생활을 하고 은퇴했는지는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무리한 등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1982년 원년에 167이닝, 이듬 해 127이닝을 던졌고 1985년엔 138이닝을 던졌으니 그랬을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경기 수가 적었고, 5선발체제와 같은 개념이 없다 보니 지금과 같은 이닝을 던지더라도 혹사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이를 테면 오늘 선발로 이닝 던지고, 내일 불펜으로 1이닝 던지고 뭐 이런 식이지요.

 

당시 MBC청룡의 대표투수 하기룡 선수는 1982년부터 첫 4년 간 매년 평균 180이닝 정도를 던졌으며, 해태 타이거즈의 에이스였던 이상윤 투수의 경우 1983년과 1984년 무려 229이닝, 211이닝을 던졌습니다.

 

하기룡 선수는 1987년, 이상윤 선수는 1989년을 끝으로 은퇴를 하게 됩니다. 역시 선수 생활이 짧을 수 밖에 없었죠.

 

최근에는 180이닝 정도 던지는 선발투수가 많기 때문에 크게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며칠 쉬고 등판한다는 개념이 없이 필요에 따라 등판했으며 특히 경기수가 지금과는 많게는 50경기에서 적게는 30경기까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투수들은 정말 살인적인 피칭을 했었고, 어쩔 수 없이 은퇴가 빨랐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특히 이선희 선수의 경우 원년 한국 시리즈에서 6차전 중 다섯 경기에 등판해서 31과 1/3이닝을 던졌으며, 전날의 구원등판 이후 6차전에서 9회까지 완투를 하다가 만루홈런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출처: 오마이 뉴스)

 

어쨌든 이선희 선수는 프로통산 6년 동안 28승 36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3.35의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평범한 기록을 남긴 그가 프로야구 원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에이스로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선희 선수는 70년대 한국 야구에서 불세출의 왼손 투수로 활약을 했었습니다.

 

경북고 시절 황규봉 투수와 함께 야구부 창단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실업야구에서 “노히트노런” 2번, 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륙간 컵) 대회에서 강호 미국을 꺾고 세계대회 첫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MVP와 함께 최다 승과 구원투수 상을 한꺼번에 받는 등 3관왕을 차지한 명실상부한 불세출의 대 투수였습니다.

 

최다 승과 구원투수 상을 한 번에 받았다는 것이 조금 웃기기도 하지만 그가 그만큼 많은 활약을 펼쳤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특히, 일본에게 단 1패도 허용하지 않은 일본 킬러의 원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1982년 프로야구에서는 15승 7패의 호 성적을 거두면서 '역시 이선희'라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개막전과 한국 시리즈에서의 결정적인 만루 홈런 때문일까요. 이듬해 5승 13패, 2승 4패로 실력이 급전직하 하게 되고 결국 MBC 청룡의 이해창 선수와 트레이드가 됩니다.

 

당시 왼손투수가 절실했던 MBC 청룡, 빠른 발과 센스있는 타격을 하는 1번 타자가 필요했던 삼성 라이온즈, 재일교포 김일륭의 영입으로 팀 내 입지가 좁아졌던 이선희 등 세 사람의 입장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이루어졌던 트레이드였습니다.

 

이 트레이드는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는데요, 우선 삼성 구단은 이선희 선수의 트레이드를 발표하던 날 구단은 이선희의 백 넘버 26번을 결번으로 남겨 놓아 화제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훗날 이선희가 선수 또는 코치로 복귀할 경우에 대비한 구단의 마음이었다고나 할까요.  또한 1982년 서정환, 1983년 정구왕에 이어 삼성야구 사상 3번째로, 그것도 선수 대 선수의 맞교환으로는 최초로 트레이드로 기록되게 됩니다.

 

 

하지만 트레이드 이후 이선희 선수의 기록은 하향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3년간 5승 7패 2세이브, 2패, 1승 3패를 기록하면서 결국 1987년을 끝으로 은퇴를 하고는 1988년부터 빙그레에서 코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1991년 삼성 투수코치로 부임, 3년간 활동한 뒤 한화 (19942000년)를 거쳐 2000년 11월 12일 다시 삼성 투수 코치로 부임해 온 후 2007시즌 후 방출되게 되면서 그라운드에서 더 이상 모습을 볼 수 없게 됩니다.  

 

2002년 한국 시리즈 우승 후 그는 코치로써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합니다.

 

“…무려 21년입니다. 세월의 무게가 한꺼번에 밀려오더군요. 다들 저보고 안쓰럽다고 해요. 하지만 투수가 홈런 한 두방 맞는 것은 병가지상사죠. 다만 저의 경우는 너무나 극적인 홈런을 연거푸 맞은 게 문제였습니다. 그래도 제가 있었기에 국내 프로야구의 발전이 한 10년쯤은 앞당겨졌을 겁니다.”  (출처: 오마이뉴스. 2006. 2. 18)

 

 

그 역시 서두에서 언급했던 홈런 두 방을 계속 마음 속에 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평생일수도 있겠군요.

 

혹자들은 프로야구가 5년만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그 판세가 많이 바뀌었을 거라고 합니다. 그 5년이 바로 이선희 선수의 최 전성기 시절이었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기록이 많이 작성되지 않았겠느냐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는 얘기가 아닐까 합니다.

 

* 덧붙임: 믿거나 말거나. 이선희 선수가 등판했던 프로야구 개막경기에서 5대0으로 앞서나가던 삼성은 5회 초 이만수의 사상 첫 홈런으로 6대2를 만들었고, 삼성 더그아웃에는 정부로부터 “프로야구 흥행을 위해 너무 일방적으로 끌고 가지 말라”는 압력이 하달되었습니다. 

 

* MBC는 6회 말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의 솔로 홈런과 유승안의 3점 홈런으로 7 대 7 동점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만큼 당시에는 프로스포츠에도 정부의 압력이 심했더랬습니다. 만약 그 압력만 아니었다면 삼성이 쉽게 이겼을 것이고, 모든 프로야구의 역사와 기록은 다르게 씌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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