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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읽어주는 남자: 낫 아웃!

역대 최고의 왼손 투수들 (3)-이상훈:마지막

by Robin-Kim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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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2003년 역시 4승4패 30세이브를 기록하면서 여전히 위력적인 투구를 선보였지만 새로 부임한 이순철 감독과의 불화로 2004시즌부터 SK 와이번스로 이적, 선수생활을 하다가 ‘도저히 LG 선수들에게는 공을 던질 수가 없다’라며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자, 여기서 여러가지 ‘설(說)’과 오해가 난무하게 되는데요 이상훈 선수의 인터뷰 내용을 근거로 한 번 시간을 그 때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아래는 당시 언론사들이 쏟아냈던 기사의 제목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찾을 수가 없네요.

 

‘이순철 감독, FA 진필중을 영입하고 싶다.’, ‘진필중 영입 시 더블스토퍼로 가겠다.’, '이순철 감독, 이병규에게 주장을 맡기고 싶다.’,  ‘이순철 감독, 이상훈 군기 잡겠다’

 

언급했다시피, 당시 스포츠 신문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낸 LG 관련 기사의 제목들입니다.

 

 

정규리그 4위팀을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만들고도 옷을 벗어야했던 김성근 감독 이후에 취임한 ‘해태 타이거즈 출신’ 이순철 감독과 LG의 베테랑-이상훈 선수 본인 말로는 ‘LG직원’이라고 함-이상훈 선수와의 교묘한 감정싸움을 언론같지 않은 언론, 쓰레기 같은 기자들이 부추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이상훈 선수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당시 이순철 감독과의 불화가 조금도 없었는데 저런 기사들 때문에 감정이 미묘해졌고, 오해가 생겼다고 했으니까요.

 

또 한가지가 기타 사건인데, 말인 즉슨 이상훈 선수가 기타를 가지고 다니며 락커룸에서 기타를 치니 이순철 감독은 그것을 제지했고,이상훈 선수는 김성근 감독과의 ‘머리 사건’처럼 받아들이지 않아 팀 전체의 불화로 번지며 결국 방출되었다는 소문입니다.

 

하지만 이상훈 선수도 그렇고, 제 생각은 이 역시 언론과 LG 구단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희대의 작품이 아닐까 하네요.

 

이상훈 선수는 당시 선수시절의 김병현 선수처럼 ‘친 기자화’되어 있지 않은 선수였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은퇴 후 다양한 방송에 많이 나오는 김병현 선수지만, 선수 시절에는 기자들과 친하게 지내려는 노력 자체가 없는 선수였었죠.

 

 

그런데 이상훈 선수도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것 등을 상당히 부담스럽게 여기고 껄끄럽게 여겼다고 하는데요, 여기서 기자들이 일단 이상훈 선수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던 것입니다.

 

거기에 LG 구단은 팀을 준우승으로 만든 김성근 감독을 해임시킬정도로 팀을 재구성하길 원했고, 거기서 가장 먼제 해결해야 할 ‘장애물’이 지독히도 말을 듣지 않는 이상훈 선수였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통제가 어려운 선수였으니까요. 

 

사실 이상훈 선수도 인터뷰에서 이순철 감독이 트레이드의 주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 것과 2010 시즌 초에 터진 구단과 이상훈 선수와의 문제만 놓고봐도 ‘LG 트윈스+스포츠 전단지’의 합작으로 불세출의 프랜차이스 스타를 팔아먹는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상훈 선수의 성격에 대한 간단한 일화를 정리해 봅니다.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이승엽 선수에게 동점 홈런을 맞고 마운드에서 내려운 손간을 이상훈 선수는 아래와 같이 회상하고 있습니다. 

 

‘당시 동점상황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고개를 떨굴 수가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라고.

 

그만큼 자존심이 센 선수였고, 상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던 그런 선수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트레이드 되었고,사실이 아닌 기사로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요.상상할 수 없는 배신감과 허탈함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뭐 어쨌든 이적후 18경기 등판에 3승 3패를 기록하고는 6억원의 연봉을 포기한 채 그라운드에서 영원히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맙니다.

 

사실 그의 프로 생활은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1993년 데뷔해서 2004년 은퇴까지 총 12년간 프로 선수 생활을 했으며, 한 번의 우승을 경험했고, 한-미-일 3개국 리그를 모두 경험한 첫 번째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은퇴 당시가 우리 나이로 34살로 최소 2~3년 이상은 더 던질 수 있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상당히 이기적인 선수라고도 합니다. 팬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위주로 생활을 하다보니 해외에서의 방황과 갑작스러운 은퇴가 이어지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제가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이상훈 선수가 보스턴에서 방출되던 날 홈페이지에 남긴 글을 소개합니다.

 

"난 꿈을 이루기 위해 어쩌면 모든 걸 다 버렸다. 알고 있다. 바보같이 보일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이런 소리는 여기 올 때부터 많이 들었다.  미쳤단 소리까지….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가게 되어있다. 난 그저 내 손으로 나의 배를 노를 저어서 가고 싶을 뿐이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언젠가는 폭풍을 만나 쓰러질 수도 있겠지만, 힘이 든다는 이유로 육지에 올라가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은퇴 후 총 4장의 음반을 발표한 록그룹 ‘What’의 리더이자 뷰티 샵의 사장으로 살아가던 불세출의 기인 (奇人). 현재는 특유의 긴 머리를 유지하며 해설을 하고 있는 변치 않는 야생마.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바람 야구를 이끈 영원한 LG맨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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