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막바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태어나면 어차피 한 번은 죽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몇 년은 더 사셔도 괜찮을 연세에 돌아가셔서 많이 안타깝고, 많이 서운했다.
그 이후 이따금씩 본가에 가면-난 따로 나와 산다- 마루에 항상 누워서 TV를 보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더 이상은 볼 수가 없어 그 빈자리가 큰 허전함으로 채워짐을 느끼곤 한다.
아버지에 관한 최고의 히트 소설은 IMF즈음에 출간된 '아버지'가 아닐까 한다. 당시 원치 않는 명예 퇴직이란 이름으로 퇴사를 강요당했던 그들은 '월급 기계'에서 '무능한 가장'으로 순식간에 신분추락을 겪으며 많은 뉴스나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었고, 비슷한 내용을 담은 책이 바로 '아버지'였다.
그리고 또 하나. 홍어.
무려 10여 년 전에 읽고 괜찮았다는 기억만 남았던 소설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다시 펼쳐보게 되었다. 그 끝에 아버지가 있다는 단 하나의 기억만으로.
홍어의 주인공은 아버지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등장하지 않다가 마지막 장면을 남겨두고 딱 한 장면만 등장한다. 그리고는 막을 내린다.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은 채 막이 시작되고 이야기는 전개되며 주인공은 막이 내리기 직전 딱 한 장면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이상한 듯도 하지만 뭐 꼭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홍어의 주인공은 '기다림'이라는 감정이니까 말이다.
누군가를 기다린 다는 것을 해 본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만남에 대한-그 대상이 사람이든 어떤 결과이든- 설렘과 긴장이 반복되는 치열한 감정의 연속이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더 나아가 기약 없는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끝없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 인내의 끝에 웃음이 나올지 눈물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홍어를 좋아한다는 단 하나의 단서만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아버지. 이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그리움,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성장해나가는 화자(話者) 세영이의 감정이 이 책을 끌어나가는 원동력이자 주인공이다. 결국 책의 제목인 '홍어'는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유일한 도구의 역할만을 하는 셈.
작가는 기다림을 지루하지 않게, 그리고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두 명의 사람과 두 가지의 사건을 배치한다. 뭐 사람이 살면서 그 어떤 일이 안 생기겠냐만, 그 어떤 사람이 인생에 등장하지 않겠느냐만 홍어에는 주목해야 할 2명과 2 사건이 있으나, 콕 집어서 얘기는 못하겠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분들에게 시쳇말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작가에게 예의가 아닌 듯도 해서다.
하지만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의 주인공, 즉 집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한 여인의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역시나 하는 관록을 보여주었다. 이름이 헛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야기 전반에 깔려 있는 '너무나' 문학적인 표현들이 거슬리긴 하지만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탁월한 절제미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의 반전은 작가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한다.
그런 것 같다. 홍어가 아버지를 연상하게 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인내심으로 상징되는 기다림, 그리고 그리움. 그런 것들이 아름답다기 보다는 생각보다 고통스럽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얼마 전에 눈이 참 많이 왔다. 얼마 전 뿐이 아니라 이번 겨울은 예년에 비해 눈이 꽤 많이 온 듯하다. 요즘처럼 온 세상을 하얗게 변하게 만드는 눈이 내리면 앞으로는 홍어가 생각날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말이다.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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