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사상이라고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믿음인 것이죠.
윤회사상은 오래 전, 그러니까 기원전부터 인간들에게는 보편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고인들을 만든 것도 또 이집트에서 파라오를 위한 피라미드를 만든 것도 죽은 사람들이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혹은 죽어서도 그 영혼이 우리 곁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고, 이런 문화나 풍습이 아직까지 세게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을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윤회 사상을 대중화 시킨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불교가 아닌 힌두교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사실 윤회 사상은 힌두교 이전부터 인도의 토착 신앙에도 존재했었다고 합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당시에는 보편적이었던 것이죠.
그러다가 인도의 지배층이 이런 토착 신앙을 힌두교로 발전시키면서 효과적인 식민 통치와 다른 종족과 피가 섞이는 것을 방지하고자 현재의 카스트 제도라는 계급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철학적 사상을 담아 퍼트린 것이 윤회 사상입니다.
그래서 힌두교의 윤회 사상은 윤회의 주체를 ‘자아’로 보고 있습니다.
즉 우리 몸은 변하고 한 생명으로써 일생은 끝이 나지만 자아는 영원불멸하며 개별적이기 때문에 죽어서도 변하지 않고 이것이 다음 생애에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인데요.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카스트 제도의 상부계층인 브라만과 크샤트리아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하층민인 바이샤와 수드라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것이죠.
그리고 불교는 오히려 이런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을 얘기합니다.
즉, 불교 역시도 윤회 사상을 얘기하고 있지만 힌두교의 윤회 사상과 다른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러니까 현재의 계급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이런 내용은 불교의 경전 중 [잡아함경]에도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붓다 (석가모니)가 기원정사에 있을 때 어떤 천민이 찾아와 윤회의 굴레는 왜 생기며
그 굴레를 끌고 가는 이 누구며 윤회의 굴레는 얼마나 굴려야 돌지 않고 사라지게 되나이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업을 따라 윤회의 굴레는 생기며 마음이 그것을 굴리면서 가노라.
돌고 돌아 그 인연이 다하는 곳에서 이 생사의 굴레는 멈추게 된다고 하였다.
2014년에 개봉한 심은경, 나문희 주연의 [수상한 그녀]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조금 색다르게 보여지는 영화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윤회를 다루지 않습니다. 70대의 오말순 (나문희)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백 투더 퓨처 (Back to the Future)]나 [타임 패러독스]처럼 시간을 돌고 돌아 과거나 미래의 나 자신을 만나는 영화도 아닙니다. 어떤 분은 ‘바디 체인지’라고 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바디 체인지’는 주인공과 또 다른 사람의 몸이 바뀌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것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현재의 오말순을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70대의 오말순이 20대의 자신으로 오늘을 사는 모습을 말이죠. 그럼 지금부터 줄거리와 함께 몇 가지 포인트를 얘기해 볼까 합니다.
영화는 오말순 (나문희)의 며느리가 시집살이에 대한 스트레스로 응급실에 실려가면서 시작합니다.
이 나이쯤 되고 보니 여자들의 시집살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스트레스를 받는지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는데요.
더구나 어린 나이에 홀로되어 가난과 싸우며 억척스럽게 아들을 키워 국립대학 교수까지 만든 오말순 여사의 며느리는 그 시집살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공감이 갑니다.
심지어 오말순 아들 반현철 (성동일)의 친구이자 담당 의사는 한 번 더 쓰러지면 가슴을 열고 수술을 해야 할 수 있으니 무조건 아내 (오말순의 며느리)를 친정에 보내서라도 쉬게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더 이상 친정 식구가 없는 아내는 갈 곳이 없기 때문에 반현철과 그의 두 자녀는 가족 회의를 통해 오말순을 요양원에 보내기로 합니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이 영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해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와 함께 정정하신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시는 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런 가족의 결정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인지상정이라 뒤숭숭한 마음을 안고 외출을 했던 오말순은 오묘한 불빛에 이끌려 ‘청춘 사진관’으로 들어가서 난생 처음 곱게 꽃 단장을 하고 영정사진을 찍는데요, 이 부분도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좀 찡하다고 할까요, 아무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정사진이란 기본적으로 장례식에 쓰이는 사진입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제삿상에도 그 사진을 올리곤 했었죠.
그래서 예전에는 살아계신 분들에게 영정사진이란 해서는 안 되는 금기시 된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봐도 정정할 때, 아직은 건강하고 또 꾸밀 수 있을 때 영정사진을 준비하시는 어르신들이 꽤 있다고 하는데요, 다시 말하면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 몸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나를 기억해주길 바라면서 말이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기억되길 바라는 것,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런데 영정사진을 찍고 손자와의 약속을 위해 버스를 탄 오말순은 버스 차창 밖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자신의 20대 모습이 보인 것이죠. 분명 자신이 있는 시간은 50년전이 아닌 현재지만 몸이 20대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으로 다시 청춘 사진관을 찾아가지만 그 사진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동네 사람들도 그런 사진관은 본 적도 없다고 하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어쩔 수 없이 70세의 자신의 모습이 아닌 20대 꽃 처녀의 모습으로 살게 된 오말순은 어린 시절 그토록 좋아했던 오드리 헵번의 이름을 따 오두리라는 이름으로 새 삶을 살게 되는데요.
하지만 갑자기 없어진 자신을 찾기 위해 아들 가족들이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는 등 자신을 찾기 위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사진관마저 없어져 자신의 힘으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오말순은 자신의 정체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과거 자신 집안의 머슴이었던 박씨의 집에 하숙을 하며 살기로 합니다.
그렇게 20대의 오두리가 어느 날 우연히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노래하는 모습이 방송국 음악 프로그램 피디인 한승우 (이진욱)에 의해 눈에 띄게 됩니다.
그리고는 음악만을 하겠다며 밴드를 하지만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손자가 몸 담고 있는 무명 밴드의 보컬로 한승우가 감독하는 프로그램에 출연, 탁월한 가창력을 선보이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고 가수 오두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또 노래를 잘하기도 했던 오말순이 자기가 원했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자신의 꿈꾸던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만석집에서 태어났지만 명 짧은 남편을 만나 어린 나이에 갓난아기와 단둘만 남게 된 오말순은 오직 자식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채 배고프고 힘들고 어려웠던 삶을 살았기에 자신이 진짜 원했던 삶, 자신이 꿈꾸던 삶을 살 수 없었는데 오두리가 되면서 그런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오두리는 굉장히 행복해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자인 반지하 (진영)가 교통사고를 당해 수혈이 필요한 상황에서 RH-라는 특이한 혈액을 가진 오두리만이 혈액 제공이 가능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오두리는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신체에서 피를 뽑게 되면 원래의 오말순으로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음에도, 그래서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박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과감히 헌혈을 하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나의 꿈과 행복보다 손자라는 가족을 선택한 것이지요.
아니, 어쩌면 70대의 자신이 20대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박씨와 오두리의 대화를 엿듣고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인 오말순임을 알게 된 아들 반현철 (성동일)은 그녀에게 울먹이며 스스로의 꿈을 위해 헌혈을 포기할 것을 얘기합니다.
“어머니, 제 자식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가세요, 제발. 제발 가서 이제는 남이 버린 시래기도 주워 먹지 말고, 비린내 나는 생선 장사도 하지 말고, 명 짧은 남편도 만나지 말고, 나 같은 못난 아들도 낳지 마세요.”
그 때 오두리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며 결심을 바꾸지 않습니다.
“아니, 난 다시 태어나도 하나도 다름없이 똑같이 살란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도 다름없이 똑같이 살란다. 그래야 내가 네 엄마고 네가 내 자식일 테니까.”
그렇습니다.
오두리는 [백 투더 퓨처 (Back to the Future)]나 [타임 패러독스]식으로 말한다면 시간의 왜곡을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살아온 지난했던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시간의 만들어 준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헌혈을 하고 원래의 오말순으로 돌아오고 영화는 행복하게 마무리 됩니다.
이 영화가 아쉬운 점은 만석꾼 집 딸이었던 오말순이 어떻게 해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인데 영화 전체를 놓고 큰 그림으로 보면 그 얘기가 없다고 해서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그냥 넘어가도 될 듯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오두리도 오말순도 모두 현재를 살아가는 본인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시간 이동도 없었고 그래서 과거나 미래의 자신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젊었을 때의 자신으로 현재의 시간을 보내며 늘 원하고 꿈꾸기만 했던 삶을 살면서 행복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꿈을 꿉니다. 가능만하다면 젊었을 때의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그래서 지금의 삶이 좀 더 행복해 지기를.
하지만 그것이 과연 행복하기만 할까요? 오두리의 마지막 대사가 여전히 되새겨집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나이가 들면 젊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서양과는 달리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보다는, 자신의 꿈을 위해 살기 보다는 자식에 대한 끝없는 희생과 또 그것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이 자식들이 장성하고 하나 둘 곁을 떠나면서 떠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래서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다고 하는 어르신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전에 누가 저에게 물어 본적이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냐고. 그 때 저의 대답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다’였습니다.
나의 과거가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돌이켜보면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서 바꾸고 싶은 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한들 지금의 제가 더 행복해진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30대의 지인은 저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지금의 이성과 지금의 감성으로 20대를 살았다면 훨씬 ‘잘’ 살았을 것 같아. 훨씬 충만하게.”
그때도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변한 모습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변할 모습이니 정말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치에서 '잘' 하는 것이 결국 내일 뒤돌아 봤을 때 어제가 될 '오늘'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과거의 나는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나일 수 밖에 없으니까. 부끄럽다고, 지워버리고 싶다고 그 때의 내가 내가 아닐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최근에 와서 드는 생각은 정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딱 한 곳, 한 지점으로는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당시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던 그 때로 돌아가 보다 현명하고 좋은 결정을 하기 위해서인데요 저도 어쩔 수 없는 보통사람인 듯 합니다.
일장 춘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는 ‘한바탕 꿈을 꿀 때처럼 흔적도 없는 봄밤의 꿈이라는 뜻으로,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지만 보통 행복하고 영화로운 긴 꿈을 꾸었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인데요.
오말순에게는 얼마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오두리로 살면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그래서 행복하기만 했던 오두리로써의 삶이 어쩌면 일장춘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 실제로 오두리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 것은 일장춘몽일 것입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현재의 나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수상한 그녀]가 긴 시간을 두고 시간 이동을 한다거나 과거의 나로 돌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면 [소스코드]는 단 ‘8분’이라는 허락된 시간 안의 과거에서 범죄자를 찾아내는 시간 이동을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소스 코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가상 공간을 머리 속에 넣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빌리거드 캐슬 (beleaguered Castle)’이란 공간이고 또 하나는 빌리거드 캐슬이 만들어 낸 영화 제목과 동일한 ‘소스 코드’라는 가상 공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소스 코드’를 가상 공간으로 보느냐 아니면 프로그램으로 보느냐는 보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가상 공간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영화의 마지막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시카고 행 출근 열차에서 느닷없이 정신 든 콜터 (제이크 질렌할)는 원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미국의 공군 대위이자 전투기 조종사로 미국의 아프간 침공 때 파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임무 수행을 위해 전투기를 몰고 가던 것까지였고기차에서 깨어난 그는 얼굴도 외모도 그리고 이름도 션이라는 교사로 기차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콜터는 션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간, 그러니까 그가 정신이 든 기차 안은 바로 소스 코드라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그가 부여 받은 임무는 열차 폭파범을 발견 해 더 큰 테러를 막아내는 것입니다.
사실 콜터는 - 영화의 막바지에 밝혀지지만 - 아프가니스탄에서 임무 수행 중 하반신이 떨어져 나간 부상을 당했으며 뇌사 상태입니다.
하지만 빌리거드 캐슬이라는 가상 공간에서 영화 내내 보여진 그의 모습은 온전한 신체를 갖고 있었으며 그 곳에서 순간 이동을 통해 소스 코드라는 가상 공간인 기차 안으로 보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차는 그 날 아침 7시 48분에 폭파 되어 ‘승객 모두가 사망’했으며 그 기차의 폭파범은 이후 시카고라는 도시를 폭탄으로 날려버릴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시카고 행 기차 폭발은 이미 실제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며, 그 과거의 사건에서 용의자를 찾아 ‘미래의 도시 폭발’을 막기 위해 ‘현재’의 정부 기관에서 콜터를 기차 폭발의 8분 전인 ‘과거’로 보낸 것입니다.
자, 여기서 왜 굳이 8분일까라는 의문이 들텐데요, 영화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전구를 끄면 곧바로 암흑이 되는 것이 것이 아니라 아주 잠시 후광처럼 잔광이 남는데 뇌 역시 마찬가지 현상으로 사후에도 잠깐은 열려 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후에도 잠시 작동하는 것이죠.
그리고 뇌 구조상 단기기억 저장소는 약 8분간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후에 사용 가능한 뇌의 부분과 8분의 단기 기억이라는 기능을 살려 개발한 것이 ‘소스코드’인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것처럼 콜터는 이미 군대에서 임무 수행 중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지만 ‘빌리거드 캐슬’이라는 가상 공간에 온전한 모습으로 재생되었고, 소스코드라는 공간에서는 션이라는 인물로 재생되었습니다.
션은 폭파된 그 기차에 탑승한 승객 중에서 성별, 체격, 신경 구조까지 거의 콜터와 유사했기 때문에 소스 코드 연구팀은 콜터를 션으로 재생시킨 것입니다.
물론 콜터는 이런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임무를 수행하다가 막바지의 사실을 알게 됩니다.
조금 복잡할 수도 있으니 간단히 요약하면 불구의 몸이 된 뇌사 상태의 콜터가 빌리거드 캐슬에서 온전한 콜터로 돌아왔고 소스코드에서는 션으로 재생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면 이 세 명의 콜터 중 진짜 콜터는 누구일까요?
영화에서 소스 코드를 개발한 러틀리지 박사가 콜터에게 소스 코드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Source code is not time travel rather source code is time reassignment.”
즉 소스 코드는 시간 여행 (이동)이 아니라 시간을 재배치 하는 것으로 소스코드 안에서 현실 세계에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우편을 보내고 심지어 피자를 배달 시킨다고 해도 현실 세계에는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수 차례 단 8분 동안의 과거로 보내진 콜터는 결국 기차 폭파범의 정체를 알아내고 빌러거드 캐슬로 돌아가 범인의 이름, 인상착의, 차량 번호 같은 것을 보고하고 임무를 완수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에서의 기차는 폭파된 상태입니다. 그것이 현재니까요.
그리고 그는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에 이제 두 곳의 가상공간에서 영원히 사라져 불구의 뇌사 상태인 자신으로 돌아와야 할 차례입니다.
하지만 이 때 콜터가 자신과 소통하며 지속적으로 자신을 소스 코드로 보내 준 임무를 수행했던 굿윈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소스 코드로 보내달라고 합니다.
바로 기차 안에서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진 크리스티나라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서.
사실 현실 세계에서는 콜터도 크리스티나도 이미 기차 폭발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오로지 소스 코드라는 가상 공간에 8분동안만 존재하는 것이죠.
더구나 콜터는 션의 모습으로 그 공간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러틀리지 박사가 얘기한 것처럼 소스 코드 안에서 일어난 일은 현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따라서 이미 죽은 크리스티나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콜터는 끊임없이 굿윈에게 딱 한 번만 더 8분이라는 소스 코드의 세계로 보내달라고 애원하고 굿윈은 그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마지막으로 돌아간 소스 코드. 그 곳에서 콜터는 폭탄을 완벽하게 제거합니다. 그러니까 기차는 폭발하지 않은 것이죠.
그리고 크리스티나와 무사히 시카고에 내려 서로 사랑하게 된 것을 확인합니다. 자신의 기억을 사진 션의 모습으로 말이죠. 소스코드라는 가상의 공간 안에서.
그런데 그 가상 공간에서 콜터가 보낸 문자 메시지가 현실의 굿윈에게 전달됩니다.
더구나 기차 폭파 사건이 미수에 그치고 벌어지지 않은 일이 된 엄청난 시간의 왜곡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굿윈과 소스코드 안의 콜터, 즉 션 뿐인데 더 놀라운 것은 현실 세계에서 콜터는 여전히 불구의 몸으로 가진 채 뇌사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정말 궁금해집니다.
진짜 콜터는 블리거드 캐슬에 있던 콜터일까요, 소스 코드 안의 션일까요? 혹은 현재가 바뀌기 전에 뇌사상태인 콜터가 진짜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바뀐 현재의 콜터가 진짜일까요?
혹은 이 것이 궁금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가 바뀌기 전, 그러니까 기차가 폭파되었던 세상이 진짜 현실일까요 아니면 기차가 폭파되지 않은 바뀐 현재가 현실일까요?
이제 여러분에게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혹은 만약에 과거나 미래로 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부분을 어떻게 바꾸고 싶습니까?
대답을 하기 전에 이것만은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과거든 미래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 지금 이 순간의 나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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