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TV를 보았을 때, 꽤나 오래 전 일이다, 20대 후반 즈음의 남자가 나와서 자기가 사귀었던 여성이 1,000명쯤 된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잠자리를 같이 한 여성이 1,000명이었는지 정식으로 사귄 여성이 1,000명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대충 느낌에는 전자의 느낌이 강했었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에서 그런 것들이 공개적으로 얘기할 만큼 ‘자랑스러워’졌음에 세월 무상을 느끼기도 하고,
그 남자와 함께 했던 여성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더랬다.
과연 그런 남녀가 정말로 애틋한 사랑과 본인이 꾸며가는 가정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춘천의 ‘김유정 역‘ 주변이 김유정에 의한, 김유정을 위한 지역이듯이 봉평은 이효석에 의한, 이효석을 위한 지역이다.
매년 메밀 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면 이효석 문화제를 비롯한 메밀 꽃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효석이란 작가는 [메밀 꽃 필 무렵]이라는 작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작가다.
그리고 [메밀 꽃 필 무렵]이 오랜 시간 동안 사랑 받아 온 이유는 무덤덤하게 흘러가던 장돌뱅이 이야기 속에
허 생원이 자신의 인생에서 단 한 번 있었던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남녀간의 사랑은 외모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모양이었나 보다.
이 곳 저 곳 장터를 옮겨 다니며 물건을 팔던 장돌뱅이 허 생원은 얼굴이 얽어 있어서,
글에서는 이 정도로만 표현되었는데 조금 더 유추해보면 얼굴이 얽어 있다는 것은 곰보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연애에는 말 그대로 꽝이다.
스스로도 자신감이 없고 그렇다 보니 여인네들도 싫어한다.
그런 그에게 딱 한 번 애틋한 시간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무더운 어느 여름, 다음 장터인 봉평 대화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허 생원과 조 선달은 일찍 전 (가게)을 접고
저녁 겸 술 한 잔 하기 위해 충주 댁이라는 주막엘 가지만 거기서 젊은 장돌뱅이인 동이가 대낮부터 충주 댁을 끼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허 생원은 젊은 친구가 그래서 되겠냐며 심하게 동이를 나무라지만
속으로는 충주 댁을 향한 자신의 연정은 자신의 외모 때문에 밝히지도 못하고 있는데
젊은 친구가 그런 충주 댁을 끼고 술을 마시는 모습에 질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꾸지람에 반성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더러워서 그랬던 것인지 그 자리를 피한 동이는 허 생원과 조 선달이 한창 술을 마시던 때
급하게 주막으로 돌아와서는 허 생원의 나귀가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얘기를 소식을 전해주었고,
그 얘기에 허 생원은 마시던 술은 제쳐두고 한 달음에 나귀에게로 달려간다.
나귀란 허 생원에게 있어 외로움을 달래주는 평생의 반려자 같은 존재였으니까.
평생을 여자에게 호감을 표시하지 못한 채 외롭게 살아 온 허 생원에게 있어 언제나 말 없이 자신과 동행하는 나귀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니까.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나귀는 허 생원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나귀를 찾은 후 허 생원과 조 선달 그리고 동이 세 사람은 그 길로 밤길을 걸어 봉평으로 향한다.
어둑한 밤, 달 빛을 받아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빛나는 하얀 메밀 밭을 지나서.
그리고 허 생원 지금까지 수 없이 반복해서 얘기해왔던 자신의 유일했던 사랑 얘기를 조 선달에게 다시 한 번 꺼내 놓는다.
오래 전 어느 여름 밤, 봉평 대화장에 갔던 허 생원은 무더위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 오밤중에 멱이나 감기 위해 개울가로 갔다가
무엇인가에 홀린 듯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왜 개울가가 아니라 물레방앗간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허 생원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며,
그것이 인연인가 보다라고 만 할 뿐 특별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마침 그 물레방앗간에 봉평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처자가 울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처럼 우연히 만났지만 울고 있던 아가씨를 달래주고 또 아가씨는 그런 분위기에 취해 두 사람은 짧지만 긴 밤을 보내고는 헤어졌다.
그 것이 허 생원의 인생에서 단 한 번 있었던 애틋한 사랑 이야기다.
그래서 허 생원은 그 후에 봉평 장은 빼 놓는 일이 없다.
그 날 밤의 애틋한 그 아가씨를 혹여나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그렇게 허 생원의 얘기를 들으며 나귀를 몰고 길을 가던 세 사람.
어머니의 고향이 봉평이고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어머니로부터 들어 본 적이 없다는,
하지만 그 아버지를 어머니는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한다는 동이의 얘기를 듣다가 허 생원은
동이의 왼 손에 나귀를 몰기 위한 채찍이 들려 있음을 발견한다.
동이가 자신과 같은 왼손잡이였던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냥 암시만 하고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오래 전 단 한 번의 애틋한 사랑의 결실이 바로 함께 장터를 돌던 젊은 동이였다는 사실을 가장 격하게 풀어 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굳이 이런 저런 설명 없이 간결하게.
내 자식임을 억지로 인증하기 위해 닮은 것 하나 없는 아기로부터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왼손잡이라는 특징이 허 생원과 동이를 부자 관계, 그러니까 가족으로 이어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아무래도 그 시절에는 왼 손잡이가 흔하지 않았으니까.
피카소는 평생 일곱 번의 결혼을 통해 일 곱 명의 여자를 만났고, 그렇게 여자가 바뀔 때마다 여자의 영향 때문인지 화풍이 바뀌었다고 한다.
카르멘도 사랑하는 남자가 수시로 바뀌었고, 카사노바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세상에는 서두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배려 없이 수시로 그 상대방을 바꾸는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이미 그런 시대가 되어 버린 시점에서 오래 전 소설 [메밀 꽃 필 무렵]은 상당히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애틋함. 누군가에 대한 애틋함. 평생 잊지 못하는 애틋함.
그리고 그 애틋함을 있게 해준 단 한 번의 사랑.
거의 20여 년 만에 읽어 본 이 소설은 나에게 그런 것을 남겨 주었다.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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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예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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