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이란 나에게 꽤나 특별한 곳이다.
떠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과 떠나 보내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눈물을 짓거나
진한 포옹을 하거나 굳센 악수를 하면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한 곳.
누군가는 설렘에 주체할 수 없는 행복의 표정을 짓거나 누군가는 안타까움 혹은 아픔의 눈물로 한 없이 가슴을 애잔하게 만드는 곳.
개인적으로는 이제 막 이륙을 마친 비행기를 보며 ‘나도 저 안에 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 없는 곳.
내게 공항이란 그런 곳이다.
‘크로코지아’란 나라에서 온 빅토르 나보르스키 (톰 행크스)에게 공항은, 꼭 집어서 얘기하자면 JFK는 뉴욕으로 향하는 요단강이었는지도 모른다.
건널래야 건널 수 없는, 눈 앞에 보이는 문만 나서면 바로 그토록 가고 싶은 뉴욕임에도 그 문을 나설 수 없는.
그래서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약속을 어쩌면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르는.
뉴욕에 도착한 시점,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그 시점에 크로코지아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빅토르는 그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지 못한다.
정부와 혁명군의 내전으로 이른바 ‘무정부 상태’이기 때문에 이미 받아 온 비자는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본국으로 돌아가기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추방 조건이 성립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설상가상으로 영어도 하지 못하는 그는 공항 보안 책임자인 딕슨에 의해 그냥 공항에 머무르게 된다.
공항에서 잠을 자고 공항에서 머리를 감고 공항에서 식사를 하며 그냥 공항에서 생활하게 되는 것. 그것도 9개월이나.
사실 그가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딕슨은 골치거리인 그를 공항 소관이 아닌 경찰 소관으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여러 차례 주었지만
그는 스스로 공항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어쩌면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문을 넘어 한 발자국만 걸어가면, 그것이 불법인줄 알았기 때문에,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어쩌면 다시 그 먼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렇다고 나라면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할 폐쇄적인 공간인 공항에서 9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갑갑함. 지루함 그리고 늘 같은 생활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한정된 공간이라는 것은 사람을 질릴 수 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그 곳을 탈출하기 위한 욕망과 본능이 끓어 오를 수 밖에 없음에도 그는 지독하게도 꿋꿋하게 그 곳에서 기다린다.
당당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그 곳을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그래서 자신이 뉴욕에 온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때까지.
그가 공항에 있던 시간만큼 그는 일거수일투족을 CCTV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로 감시 당한다.
그가 밥을 먹든, 누구와 만나든, 어디서 무얼 하든.
마치 [1984]의 ‘빅 브라더’에 의한 것처럼 그는 그 같은 감시 과정을 통해 통제된다.
하지만 그것은 꼭 공항이 아니더라도 거리에서, 인터넷에서, 전화를 통해 우리가 하고 듣고 있는 모든 말들을
감시 당하는 현재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슬프다.
나의 모든 일이, 내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이 누군가에 의해 낱낱이 기록되고 감시 된다는 사실이 슬프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 감시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자유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나라인 미국을 비꼬기 위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보이지 않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공항에 살면서 그곳에 익숙해진 빅토르는 그렇게 공항에 적응해 간다.
익숙하다는 것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불편함이 편함으로 바뀌고 나의 인식이 남의 인식과 같아지고, 그 익숙한 것을 떠나 보내면 또 다시 불편함으로 회귀하게 되는 그런 것.
그 곳에서 그는 친구를 사귄다.
인도에서 비리 경찰을 칼로 찌르고 도망 온 공항 청소부 굽타, 기내식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엔리크 크루즈,
수하물 처리반인 멀로이, 하루에 한 번씩은 비자 신청서에 도장을 받으러 찾아가는 그래서 나중에는 친구만큼 익숙해진 토레스까지.
그 와중에 엔리크와 토레스의 사랑의 징검다리 역할도 해준다.
운명적인 사랑도 만난다.
‘Wet Floor’라는 안내문을 보지 못하고 미끄러져 구두의 뒷굽이 나간 승무원 아멜리아 (캐서린 제타 존스).
그런 그녀를 도와 준 첫 만남 이후 몇 번의 우연한 만남을 거쳐 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원래의 남자친구였던 유부남에게 돌아간 그녀 때문에 실연의 상처도 안게 된다.
공항 안에서.
그러던 어느 날, 본국의 내전이 종식되어 빅토르는 다시 합법적인 국민의 지위를 얻었지만 골치아픈 그를 딕슨은 크로코지아로 돌려 보내려 한다.
뉴욕으로 들어가게 되면 굽타, 엔리크, 멀로이가 그 동안 행해온 규칙 위반을 이유로 해고 시킨다는 협박을 통해.
그렇게 그는 뉴욕에 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본 국으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지만
굽타의 강력한 조언으로 공항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 속에 뉴욕으로 걸어 나가게 된다.
뉴욕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가 뉴욕에 온 목적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색스폰 연주자 베니 골슨의 사인을 받는 것.
아버지가 생전에 재즈 음악에 심취하며 다양한 방법을 통해 뉴욕의 한 재즈 클럽에 있는 연주자들의 사인을 받아서 모았는데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던 베니 골슨의 사인만 없었던 것. 그래서 베니 골슨의 사인을 받아 아버지의 소원을 대신 이뤄주고 싶었던 것.
그렇기 때문에 빅토로는 다른 연주자들의 사인을 모아 깡통 안에 넣고는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공항 어디에서도 그 깡통을 분신처럼 들고 다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어떻게든 달성해야 할 목표였으며 그 이전에 아버지와의 약속이었다.
누군가와의 약속.
그 상대방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과의 약속은 지켜질 때까지 유효하다.
[분노의 질주: 언 리미티드]에서 도미닉이 빈스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돈을 몰래 두고 나온 것처럼.
그리고 그 약속은 빅토르로 하여금 9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공항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불편한 것을 참고 기다리며 생활하게 해 준 버팀목이 되었다.
톰 행크스의 영어를 못하는 탁월한 연기, 늘씬한 각선미와 탱탱한 피부를 자랑하는 젊은 시절의 캐서린 제타 존스를 보는 재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숨겨 놓은 시사 풍자까지 꽤나 볼거리가 많은 영화지만 이 영화를 더욱 볼만하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이 영화의 바탕이 된 실화 때문이다.
이란 사람인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는 1970년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1976년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유학시절 왕정 반대 시위에 가담한 전력으로 인해 추방을 당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나세리는 정치적 마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추방되고 만다.
이후 네덜란드, 벨기에 등으로 옮겨 다니며 망명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는 1988년 샤를 드골 공항에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 정부는 1999년 마침내 그에게 망명자 신분을 주기로 결정했지만
관련 서류에 자신의 이름이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라고 적혀 있다는 이유로 망명 권유를 거절했다.
16년 동안 그를 돌봐온 공항 소속 의사 필리프 바르갱은 '불행한 과거사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본명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영화 [터미널]의 제작사인 드림웍스가 저작권 개념으로 30만달러를 그에게 지불했지만 그에게는 관심 밖이다.
여전히 햄버거를 사고 신문을 사느라 매일 몇 유로씩만 지출한다.1
물론 실화 주인공과는 국적이나 상황 등 여러 가지가 많이 다르지만 제작팀에서 저작권료로 그에게 30만불 정도를 지급했다고 하니
미국의 저작권 개념도 놀랍기 그지 없다.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 본지가 꽤 되었다.
가면 남는 것은 아쉬움뿐이기에 가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라, 현명한 일이라 생각되지만
공항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설렘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천상 떠나야 하는 팔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앞으로는 공항에 가면 누군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혹은 그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곳에 온 또 다른 빅토르가 있는지 눈 여겨 봐야겠다.
동병상련이니까.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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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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