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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읽어주는 남자: 낫 아웃!

[KBO 프로야구] 역대 최고 포수 열전!-이만수: 첫 번째 이야기

by Robin-Kim 2024.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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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홈런, 1호 타점의 주인공.

 

-  프로통산 100호 홈런과 200호 홈런을 처음으로 기록한 선수

 

- 3년 연속 최다 홈런 기록을 보유한 선수 (1983~1985)

 

- 프로야구 최초 타자 트리플 크라운 달성 (1984년 타율, 타점, 홈런)

 

- 5년 연속 포수부문 골든 글러브 수상 (1983~1987)

 

이쯤 되면 누군지 다들 아시는 분, 바로 SK 와이번스 이만수 감독 (이하 편의상 ‘선수’로 표기)의 선수시설 얘기입니다.

 

 

지금은 두산의 이승엽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를 상징하고 있지만, 그 원조는 이만수 선수입니다.

 

이처럼 대구의 상징이자 삼성 라이온즈의 상징인 이만수 선수는 사실 강원도 철원출생입니다.

 

하지만, 집안의 이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학교는 대구 중앙초등학교-대구중학교-대구상업고등학교-한양대를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대구인이자 삼성맨이 된 것이지요. 아마 강원도에 야구단이 있었으면 강원도를 대표하는 야구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더구나 중학교 시절 포지션은 포수가 아닌 투수였습니다.

 

대구중학교 3학년 때는 투수로써 1974년 ‘문교부장관기 쟁탈 전국 중학 야구대회’에서 학교를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만수 선수가 포수로 정착한 것은 고등학교에서부터라고 합니다.

 

 

 

1977년 6월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제32회 청룡기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이만수 선수는 드디어 강타자로써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타율, 최다안타, 타점 등 4관왕에 오르며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힌 이만수 선수의 활약에 힘입어 대구 상고는 1970년 대회 이후 7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야구 대회는 지금의 프로야구 열기만큼이나 인기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만수 선수의 이름은 단 번에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같은 해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1977년을 기점으로 이만수 선수는 강타자로 기억되었고, 치열한 스카우트 전을 뚫고 한양대학교가 고등학교 선배인 장효조 선수를 앞세워 이만수 선수를 데려오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대학시절 이만수 선수는 또 하나의 작은 일화를 만들게 됩니다.

 

1980년 일본에서 세계선수권 대회가 열렸을 당시 어깨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김시진 전 넥센 히어로즈 감독의 대체 선수로 대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 기록이 대타로 한 번 출전하여 번트를 댄 게 전부일 정도였습니다.

 

대체선수로 출전하게 된 이유도 당시 이만수 선수는 대학춘계리그에서 우승, 일본 긴키대와의 친선경기를 위해 나가있었고 국가 대표팀은 다른 선수를 포함시키기에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아무튼 그 대회에서 한국은 준우승을 했고 이만수 선수는 병역 면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왜 이만수 선수가 처음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어찌됐던 시간이 흘러 대망의 프로야구 개막전.

 

이만수 선수는 1982년 MBC청룡과의 경기에서 이길환 투수를 상대로 1회 초 1사 2루 상황에서 2루타를 만들어 내면서 프로야구 1호 안타와 1호 타점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회에는 유종겸 투수를 상대로 프로야구 1호 홈런 (솔로 홈런)을 기록하면서 그를 아는 팬들에게는 ‘역시 이만수’라는 얘기를 들었고, 당시까지 이만수를 모르던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을 머리 속에 강하게 기억시킵니다.

 

▶ 두 번째 이야기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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