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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읽어주는 남자: 낫 아웃!

[KBO 프로야구] 역대 최고 포수 열전!-김무종 편

by Robin-Kim 2024.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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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에서 포수는 이 선수 전과 후로 나뉜다’라고 할 때 이 선수는 과연 누구일까요?

 

프로야구 초창기, 투수들에게 몸 쪽 승부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포수타자의 타격 스탠스와 발 모양에 따라 공 배합을 달리 했던 포수-

 

포수가 투수의 공을 받아주는 역할이 아닌 경기 전체를 지배하는 역할이라는 것을 알려준 포수-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에서 포수는 이 선수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하는 포수, 바로 해태 타이거즈에서 83년부터 선수로 뛰었던 김무종 선수입니다.

 

히로시마 카프 시절 김무종.

                 

1983년 2년차를 맞은 한국 프로야구는 전력 평준화를 위해 재일동포 입단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 때 삼미 수퍼스타즈에 입단했던 선수가 투수 장명부, 해태 타이거즈는 투수 주동식과 포수 김무종이 입단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1984년에 넘어 온 선수가 삼성의 김일융, 롯데의 홍문종 선수 등이 있고요.

 

사실 김무종 선수는 일본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는 아닙니다.

 

1972년부터 1982년까지 히로시마 카프스란 팀에서 총 11년의 경력을 갖고 있지만 총 15경기에서 20타수 3안타로 1할 5푼의 타율과 1홈런 2타점이라는 미미한 성적을 남겼는데요. 

 

수비는 좋지만 타격이 좋지 않아 프로 생활의 대부분을 2군에서 보내던 중 주동식 선수 (투수)와 함께 해태 타이거즈로 건너오게 되는데요, 이 과정이 또 한 편의 드라마처럼 파란만장합니다.

 

 

 

김무종은 가족 회의 끝에 해태 행을 결심했지만 1982시즌 종료와 함께 다음해 360만 엔을 받는 조건으로 히로시마와 계약을 맺은 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히로시마는 당연히 해태에 이적료를 요구했고 해태는 줄 수 없다고 버티던 중 김무종 선수 본인이 그 이적료를 부담하기로 하며 문제는 일단락 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히로시마가 이적료로 500만 엔을 요구하면서 다시 문제가 불거졌고, 이때 장훈이 중재에 나서서 이적료를 300만 엔으로 낮춰주었으나, 이번엔 해태에서 ‘엔화로 계약금과 연봉을 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어기고 환율이 가장 싼 날을 택해 원화로 계약금과 몸값을 지불 했다는 것인데요. 1     

 

그야말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국내 프로야구에 진출했는지 그 속은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해태로써는 보물을 얻은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전년도에 7승과 9승에 그쳤던 이상윤-김용남 투수를 각각 20승, 13승 투수로 되도록 리드하여 1983년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타율은 낮았지만 타점 5위를 차지할 정도로 타석에서의 집중력도 돋보였습니다.

 

특히 경기 전 훈련을 마치고도 그 날 상대팀 타자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기 위해 쉬지 않고 덕 아웃에서 상대팀 훈련을 지켜볼 정도로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요, 마치 요즘의 데이터 야구에 버금가는 모습을 당시 한국 프로야구에서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시상식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김무종. 왼쪽. (출처: 나무위키)

 

그 덕분에 그가 주전 포수로 활약했던 5년 동안 (1983~1987년) 해태는 3번 우승했으며(1983, 1986,1 987년), 그렇게 해태가 우승할 때마다 마운드에는 이상윤-김용남-선동열-문의수-김정수 등의 수준급 투수들이 있었지만 홈플레이트 뒤에는 언제나 김무종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김무종 선수는 주전 포수 자리를 장채근 선수에게 넘겨주고 단 9경기만 출전했고, 그 뒤로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1991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한 김성근 전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삼성 배터리 코치로 다시 한국에서의 활동을 이어가는 듯 했으나 1992년 시즌 후 김성근 감독의 해임과 함께 동반 해임되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언제나 입버릇처럼 “내 꿈은 해태 수비 코치가 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바람은 이루지 못한 선수.6시즌 통산 2할 4분의 타격, 두 자리 수 홈런 단 1회 밖에 안 되는 타격기록으로만 보면 별 볼일 없는 선수로 기억될 수도 있는 김무종 선수.

 

하지만 첫 문장에서 썼듯이 대한민국 프로야구에서 포수는 ‘김무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현대 포수들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30년 전에 이미 보여준 수준 높은 포수였던 선수.

 

전 아직도 타자가 내야 땅볼을 치면 1루수 뒤 쪽으로 열심히 뛰어가던 김무종 선수가 이따금씩 생각납니다.

 

▶ 이만수 편 보러 가기

 

  1. 1) 일부 박동희 기자 블로그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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