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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어주는 남자:엔딩 크레딧

영화 vs 영화 (29): 더 기버:기억전달자 vs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vs 더 퍼지: 거리의 반란 - 유토피아는 존재하는 것일까?

by Robin-Kim 2016.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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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우리는 늘 이상향을 꿈꾸어 왔습니다.

조선 시대 허균의 소설 [홍길동]에 등장하는 율도국,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의 배경이 되는 무릉도원,

페르시아에서 유래해서 고대 그리스에 소개되어 알려진 파라다이스까지 인간은 언제나 끊임없이 이상향을 꿈꾸어 왔는데요,

이런 이상향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아무래도 유토피아 (Utopia)일 것입니다.

 

유토피아란 단어는 토머스 모어라는 사람이 1516년에 출간한

[최적의 국가 형태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대하여 (De optimo rei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라는 소설에 처음 사용되었는데요

이후에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영향을 받아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언급하면서 동서양을 넘어 최고의 이상향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토피아의 어원을 보면 조금 재미있는데요 그리스어의 없다좋다는 두 가지 뜻을 가진 ‘ou’라는 단어와

장소라는 뜻을 가진 ‘toppos’라는 두 단어를 합쳐서 만든 것인데

그러고 보면 토머스 모어는 처음부터 좋은 장소인 유토피아란 없다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소설을 쓴 게 아닐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토머스 모어가 말한 유토피아는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그 맥락이 닿아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유토피아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보다는 그런 욕구들을 효율적으로 억제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라고 보았으며

누구나 생산분배 그리고 소유에 있어서 평등하게 적용되고 교육이나 취미와 같은 개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서도

평등한 기회가 제공되는 사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요즘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어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복을 위한 소유욕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남들과 똑같이 분배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런 인간의 속성을 가장 잘 활용한 자본주의는 살아남았지만 공산주의는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죠.

즉 인간이 가진 본성을 무시한 것이 공산주의가 실패한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평등한 사회를 통한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철저한 감시인 것이죠.

누군가가 통제를 벗어나 하나라도 더 가지려 한다든가 조금이라도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게 하는 방법은

철저한 감시 그리고 그런 감시를 통한 공개적인 처벌일 뿐입니다.

결국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기 위한 유토피아 건설에 필요한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감시와 처벌이 될 수 밖에 없으며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가 감옥이 공장이나 학교 그리고 군대나 병원과 비슷하고

또 다시 이런 모든 곳들이 감옥과 닮았다고 해서 무엇이 놀라 운가라고 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유토피아와 빅 브라더는 뗄레야 떼기 힘든 상관관계를 가지는데요, 빅브라더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 개봉했던 [더 기버: 기억 전달자]는 이런 내용을 정확하게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런 도시가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없지만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냅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폐허 위에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리 사욕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도 없이 이름만 있으며 모두가 똑같은 교육을 받고 모두가 평등한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평등하게 비슷한 규모의 집에서 살아갑니다. 심지어 학교를 졸업한 이후 직업조차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 아닌 주어진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으로 그들은 지속적으로 감시와 통제를 받든 습니다.

휴식 시간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며 심지어 잠자는 시간까지 정해져 있으며

이런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원로회라는 이 도시를 통제하는 기구를 통해 감시 당합니다.

이 원로회의 임원들은 이전에 살던 곳이 폐허가 된 이유를 인간의 욕심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인간의 욕심을 억제함으로써

구성원 (도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평등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감시와 통제 그리고 그것을 통한 체벌을 기반으로 말이죠.

그리고 그런 완벽한 통제를 바탕으로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전쟁이나 질병과 같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원로회가 이처럼 완벽하게 통제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물론 감시도 있지만 매일 아침 모든 사람들이 맞는 주사를 통해 기억을 지우는 것입니다.

기억을 지움으로써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들도 사라지게 되고 그런 감정들이 사라지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욕심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즉 이 영화는 사람의 감정이란 것도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닌 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생긴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느꼈던 기억을 지우고 백짓장 상태로 만들면 감정도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사는 사회 (도시)는 음악도 춤도 없으며 당연히 사랑이라는 것도 없고 색깔이라는 것도 없기 때문에

 즉 차별이라는 인간의 욕구를 끌어낼 만한 모든 잠재적인 요소를 제거한 사회이기 때문에- 이 영화의 전반부는 계속 회색으로 처리됩니다.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들이 모두 회색인 것이죠.

 

 

그런데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과거의 기억을 보유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원로회 중의 한 명이면서 Memory Giver라고 불리는 기억 전달자인데요

그가 기억을 가질 수 있는 있는 이유는 그들이 사는 사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과거에 발생했던 비슷한 일들이 처리되었던 방식을

다른 원로회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인 조너스 (브래든 스웨이츠)는 현재의 기억 전달자의 뒤를 이을 인물로 지명이 되는데요,

현재의 기억 전달자로부터 과거의 기억을 전달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 사랑스러운 키스, 흥겨운 음악과 즐겁게 춤추는 모습들을 전달받으면서

무미건조한 이 도시의 구성원에서 점점 인간 본연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 보육원에서 일하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아기를 성장이 표준보다 더디다는 이유로 아무 감정 없이 죽이는 모습을 보고는

이 도시를 탈출하기로 합니다.

이 영화의 설정이 배경이 되는 이 도시의 경계를 누군가가 벗어나서 일반적인 세계로 진입하면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기억이 돌아오고 따라서 감정도 되살아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조나선은 역시나 죽을 위험에 처한 자신의 집에 분배된-그렇습니다. 이 도시는 신생아마저도 각 가정에 고르게 분배합니다-

가브리엘이라는 아기를 구해 함께 이 도시를 탈출하고 도시는 회색이 아닌 천연색으로 바뀌며 이 영화는 마무리 됩니다.

 

 

 

어찌 보면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누구나 불평불만 없고 모두가 평등한 삶을 살며 심지어 전쟁이나 질병과 같은 고통도 없는,

그러니까 우리가 늘 꿈꾸는 유토피아 같은 곳이지만 런 유토피아를 위해 희생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마저 잃게 되는 것이 옳은지,

그리고 완벽한 감시와 통제가 옳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정면으로 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도시 같은 곳이 과연 유토피아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인간이라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가질 수 밖에 없는

다양한 감정들과 행복의 조건들을 버리는 것이 과연 행복한가라는 명제 때문인데요,

아마도 술안주로는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는 괜찮은 소재라는 생각도 드네요.

 

 

 

유토피아를 다른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이 훨씬 행복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를 너무나 많은 인구라고 보고

적절한 인구수 조절만이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구상에 살기 때문에 식량 문제가 발생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각종 환경오염으로 인해 

지구에 이런 저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인구수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인구수가 적절하게 조정되고 나면 굳이 우리가 이상향을 따로 찾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요, 실제로 그런 집단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과 테러 그리고 학살 같은 것들이 그 집단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는 얘긴데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다룬 영화가 두 편이나 존재한다는 것이 조금 슬프기는 한데요

바로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Kingsman: The Secret Service)/이하 킹스맨] [더 퍼지: 거리의 반란 (The Purge: Anarchy)/이하 더 퍼지]입니다.

 

 

‘Manner maketh man’라는 대사로 유명한 [킹스맨]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모를 영국의 비밀 요원들의 조직인데요,

이 조직에 대항하는 발렌타인 (사무엘 L 잭슨)이 바로 인구수 조절을 통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런 목표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스마트 폰의 유심칩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무료로 주어

통화는 물론 데이터까지 완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인데요 그 유심칩은 사실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 유심칩을 통해 특정한 주파수 (전파)를 내보내게 되면 사람의 이성이 한 순간에 무너지면서 분노로 가득 차

다른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킹스 맨 조직은 발렌타인의 그런 목적이 실행되기 직전 가까스로 그를 제거하고 인류를 구한다는 내용입니다.

 

[킹스 맨]이 스파이 물과 액션을 적절히 잘 버무린 시원한 영화라고 한다면 [더 퍼지]는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진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32년 미국은 범죄율이 제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사회가 되는데 그 이유는 9년전 (2023년으로 추정)에 취임한 창시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정한 숙청의 날’, Purge Day 때문이라며 정부는 숙청의 날을 지속적으로 시행합니다.

숙청의 날이란 1년에 단 하루, 해지는 시간부터 해 뜨는 시간까지 미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분노를 표출하며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누구라도 죽일 수 있으며 그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용서가 되는 그런 날입니다.

그러니까 단 하루 (사실상은 반나절)동안 공식적으로 그 어떤 범죄도 용서가 되기 때문에 누구나 분노를 표출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나머지 364일동안 범죄가 없는 세상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숙청의 날은 굉장히 잔인한 날이죠.

그런데 정부가 그렇게 숙청의 날을 공식적으로 허가한 진짜 이유는 바로 인구 수를 적절히 조절하기 위함입니다.

즉 인구 수를 조절하며 복지로 들어가게 되는 세금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는데 바로 돈 많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불평등입니다.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살인이 벌어지는 곳에서 부자들은 철옹성 같은 집에 경호원들까지 고용하며 자신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기껏해야 현관문에 두꺼운 문을 덧대는 정도밖에 할 수 없으니까요.

결국 이 정책은 앞서 얘기한 정부의 세금 지출을 줄이기 위한 정책일 수 밖에 없는 것인데요,

아무래도 복지를 위한 세금은 부자로부터 얻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출하는 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정부의 이런 숙청의 날에 반대하는 카멜로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킹스 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들은 굳이 발렌타인이 무료로 제공하는 무료 유심 칩을 사용할 필요도 없으며 설령 사용한다 하더라도

발렌타인에 의해 엄청난 금액을 내고 사전에 구제되어 무자비한 폭력과 살인의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두 영화도 유토피아를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통제에 의해 사람들이 관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영화들과의 차이점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목적과 방법이 가진 사람들을 위한 세상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게 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유토피아를 꿈꿀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얘기하는 천당이나 불교에서 얘기하는 극락은 아닐지라도 걱정과 근심없이 하루 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유토피아를 말이죠.

 

 

 

제가 베트남 무이네를 여행할 때 만났던 현지 아저씨는 세상에 이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하루 일과는 별 것 없습니다.

동네에서 수퍼를 운영하며 여행자들에게 자전거를 빌려주는 일도 하는 이 아저씨는

하루 종일 그물 침대에 누워 있다가 누가 물 사러 오면 물 팔고, 맥주 사러 오면 맥주 팔고 자전거 빌리러 오면 자전거 빌려주고는

또 그물 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시간을 보냅니다.

전혀 급할 것도 없고, 짜증날 일도 없으며 일이라는 것에 치어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그런 아저씨의 생활을 보며 저 아저씨는 지금 천국에 사는 걸 거야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글의 주제로 표현한다면 유토피아에 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 하나만 기억했으면 합니다.

 

토머스 모어가 얘기한 유토피아든 홍길동의 율도국이든 아니면 도원명의 무릉도원이든

우리들 스스로의 노력 없이는 그런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군가의 감시와 통제로 인해 만들어지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어디서 행복을 찾느냐에 따라 유토피아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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