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영화’라 함은 말 그대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재난을 통해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본성을 끄집어 내는 영화라고 개인적으로는 정의한다.
따라서 영화의 규모 (스케일)는 소재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화산 폭발이나 지구 멸망 혹은 쓰나미 같은 것을 소재로 한다면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 것이며 그만큼 규모도 클 것인 반면
기상 악화나 질병들을 소재로 한다면 제작비가 그다지 많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규모를 떠나 재난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고 지나가는 것은 그런 재난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가다.
우리는 남을 도우며 남과 어울려 평화롭게 살라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런 학습은 평상시에는 아주 좋은 효과를 나타낸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기부를 하고 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생활을 일반적으로 다들 하고 지낸다.
하지만 문제는 재난이 닥쳤을 때다.
지진, 화산 폭발, 쓰나미와 같은 재난에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어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것으로 예상되면
인간은 기존의 학습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가장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할 수 있는 한의 식량과 물을 사재기 혹은 탈취하고, 가장 먼저 문제가 발생한 지역을 빠져나가려 전쟁을 방불케 한다.
남은 어찌되든 상관없이 내가 가장 우선이며 내 가족이 가장 우선이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다행인데, 때에 따라서는 멀쩡했던 사람이 아무 죄의식 없이 사람들을 죽이기도 한다.
우리 말에 같이 고스톱 쳐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사실 진짜 사람에 대해 알려면 재난이 닥쳐 보면 안다.
기존 헐리우드의 재난 영화들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엄청난 규모의 재난 영화를 만들어 왔다면 이 영화는 바이러스에 의한 재난을 소재로 하고 있다.
마치 우리 영화 [연가시]처럼.
조금 독특한 점은 질병 발생 이틀 째 (Day 2)부터 시작하여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영화의 끝에서
이 바이러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Day 1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 것만 빼면 사실 딱히 별 볼일 없는 영화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 하다.
우연히 자기를 임상 실험 대상으로 하여 신약을 개발한 것도 그렇고,
그렇게 탄생한 신약을 정부 고위 관리층부터 복용할 수 있게 조치한 내용도 딱히 새로울 것 없이 없다.
25곳의 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했는데 그것을 치밀하게 다루지도 않았으며
홍콩으로 파견 간 WHO 여직원이 신약을 먼저 받을 수 있도록 인질로 잡히게 된 지역에서 어울리며 평화롭게 지내는 것도 억지스럽다.
전반적으로 기승전결 없이 그냥 기승에서 쭉 이어지다가 영화가 끝나는 느낌이다.
최초의 발병인으로 나온 기네스 펠트로나 나이 들어 머리 빠지고 퉁퉁해진 맷 데이먼을 보는 재미도 그다지 흥미롭지 못하다.
이야기 전개가 밋밋하다 보니 배우들도 거기에 묻히는 느낌이다.
누구는 ‘충격적인 재앙 영화’ 혹은 ‘궁극의 공포’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런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밋밋하게 영화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연가시는 신선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제대로 된 질병 영화가 나올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주었다.
적어도 재혁 (김명민)이 현실성 없는 자비심을 베풀기 전까진.
그게 우리 나라 영화의 한계다.
대체 내 가족이 죽어가는데, 그리고 그 질병을 낫게 해줄 약을 아주 소량이나마 어렵게 구했는데
거기서 뜬금없이 남을 위한 이타심과 자비심이 생긴다? 너무 억지스러운 설정이고 말이 안 되는 장면이었다.
한 번 억지스러운 장면이 나오니 그 이후가 다 꼬여 버렸다. 공감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보통 재난 영화는 ‘저럴 수도 있구나’라는 공감 속에 손바닥에 땀이 나는 스릴감이나 이야기 전개가 있어야 되는데
한 번의 억지스러움이 끝까지 가실 않다 보니 그 이후 공감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영화를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소설이든 영화든 ‘이야기가 있는 컨텐츠’는 공감이 있어야 한다.
‘저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공감이 기본적으로 밑바탕에 깔려야 이야기를 끝까지 볼 수 있다.
그리고 치밀하고 짜임새 있는 구조가 그 위에 얹어져야 한다.
밋밋하거나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전개를 가진 컨텐츠는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거의 20년도 더 전에 본 ‘미져리’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그래서 일 것이다.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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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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