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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어주는 남자:엔딩 크레딧

영화 vs 영화 (13): 완득이 vs 죽은 시인의 사회-꼴통 선생 덕분에 행복한 그들의 청춘

by Robin-Kim 2013.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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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으로 얘기하자면 성숙되지 않음.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좌충우돌.

한국이든 태평양 건너 먼 나라인 미국이든 청소년을 상징하는 단어 중 이만큼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은 언제나 좌충우돌이다.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그들만의 특권이며 그렇게 좌충우돌 하는 과정에서 넘어지고 깨지고 부딪치며 무언가를 배우고 깨달으며 성숙해져 간다.

규칙에서의 일탈도 하지 않는다면, 정해진 길로만 안전하게 걷는다면, 호기심 가득한 눈 빛으로 무언가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직무유기다.

그래서 10대를 우리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라고 부른다.

 

하지만 좌충우돌하는 그들을 그대로 놔두기만 한다면 그것은 또 어른들의 직무유기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하고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딛어

결국에는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윽박질러서는 안 된다. 강요해서도 안 된다.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해서도 안 된다.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생각을 들어주고 꿈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대화를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고민과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꿈에 대해 대화를 하고 조언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말로 하면 선생님이고 서양말로 하면 멘토.

그것이 좌충우돌 10대들에게 꼭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완득이]의 동주와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은 가장 완벽한 선생님이자 가장 완벽한 멘토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비록 행동거지와 교육 방식은 전혀 다르더라도. 그래서 기존의 가치관이 어린 시선으로 보면 그들은 꼴통이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다.

 

영화 [완득이]는 현재 우리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 중의 하나인 다문화 가정을 정면으로 조준한 영화다.

우리네 모습과 조금만 달라도 곁눈질로 훑어보거나 속으로 비하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특성 상,

특히나 백인 혼혈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흑인이나 동남아 혼혈에게는 속으로나마 혀를 끌끌 차는 우리나라 사람들 특성 상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동남아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마음 속 상처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하물며 단 한 번도 엄마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채 자란 청소년기에 자신의 어머니가

가난한 필리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뜨거운 청춘에 어긋나지 않으면 이상할 일이다.

하지만 완득이 (유아인)는 그러지 않았다.

껄렁대는, 어찌 보면 뭐 선생이 이따위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선생님 동주 (김윤석) 덕분에.

 

 

무려 20년도 더 전인 1989, 신사동의 어느 작은 극장 안 어둠 속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 없었던 영화.

키팅 선생님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학교를 떠나게 되는 순간 그를 따르던 여러 명의 학생들이 하나 둘 씩 책상 위의 올라

캡틴, 오마이 캡틴이라며 눈물을 흘리는 마지막 장면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들 만큼 감동적이다.

이제는 감정이 메말랐을 것 같았던 요즘의 나에게도.

 

 

꼽추라는 장애를 가진, 그래서 정상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평범한 한국 여성과 결혼할 수 없었기에 캬바레 댄서를 거쳐

시골 5일장을 전전하며 춤을 추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아버지를 둔 완득이.

18년 동안 아버지에게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던 엄마에 대한 진실을

어느 날 느닷없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툭 뱉어낸 동주로부터 듣게 된다.

가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만큼 언덕 배기 좁은 골목에 위치한 동네 교회에서 제발 좀 죽여주세요라며

하느님께 빌어 마지 않던 담임 선생님 동주로부터

 

* 동주를 죽여달라고 빌고 있는 완득이

 

학생들은 헬튼 (Hell-ton)이라고 부르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 웰튼에 전학 온 내성적인 성격의 토드.

룸메이트 닐을 통해 또 닐의 친구들인 녹스, 찰스, 카메론, 믹스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새 학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영국의 명문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키팅 선생님이 전근을 오면서 미국 10대들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시작된다.

 

* 키팅 선생님이 오면서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 잡게 된다.

 

영화에서 완득이는 꼽추면서 가난한 아버지를, 18살이 되어서야 알게 된 필리핀 어머니를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 안으려 한다.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인정하려 한다.

그런 완득이의 모습에 나를 투영해 본다. 과연 내가 완득이라도 그럴 수 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청소년 범죄 기사의 대부분이 부모의 잘못된 교육 혹은 집안의 가난

그것도 아니면 남들과 다른 가족의 모습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인데 그런 것들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이팔청춘들에게 담담히 받아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음을 안다.

그렇게 때문에 완득이가 참 기특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처럼 기특한 완득이의 뒤에는 완득이를 그렇게 만든 껄렁대는 선생님 동주가 있었다.

 

* 툭 던지듯 엄마의 비밀을 알려주는 동주와 그 얘기를 듣고 충격에 빠진 완득이.

 

오래 전 웰튼 스쿨의 졸업생이었던 키팅 선생님의 교육 방식은 색다르다.

아니 독특하다. 어쩌면 신선하다.

어떤 단어를 갖다 붙이더라도 소위 말하는 일반적인교육 방식에서는 벗어난다는 얘기다.

사물을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학생들을 교탁 위에서 뛰어 내리게 하거나

()라는 것을 정의해 놓은 교과서의 가장 앞 장 (chapter)을 찢으라고 하는가 하면

천편일률적인 획일화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교실이 아닌 교정에서 발을 맞춰 걷게 하는 등의 수업을 진행한다.

그런 키팅에게서 닐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 모임에 대한 전설을 듣고 친구들을 모아 그것을 다시 재현한다.

학교 근처 어딘가의 동굴에서 시를 얘기하고 사랑을 얘기하고 꿈을 얘기하는 그들만의 모임을.

 

 

* 오래 전 죽은 시인의 사회하는 비밀 클럽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는 학생들

 

완득이의 집에서 마주보고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옥탑방에 사는 담임 선생님 동주는

학교에서 가난한 학생을 대상으로 나눠주는 햇반을 완득이에게서 뺏어 먹거나 학생들이 학원에서 선행 수업을 하는 것을 쿨하게 인정하거나

아이들은 자습시키고 자신은 숙면을 취하는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이지만

원래는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면서 학대하는 수준의 경영을 하는 돈 많은 경영자의 아들이다.

그 때문에 동주는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에 슬퍼하거나 분노했고 또 그 때문에 그들의 문제에 깊게 관여하면서

그들을 돕는 모임을 운영하는 가슴 따뜻한 사람이다.

완득이가 동주를 죽여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 교회도 사실은 동주가 세운 것.

그리고 그 교회를 거점으로 모임을 갖는 외국인 노동자들 중에 완득이 엄마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득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오히려 더 상처받지 않도록 지나가듯이 툭 던졌는지도 모른다.

나한테 왜 그래요? 나도 모르는 엄마를 어떻게 아세요?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하세요라며 울부짖는 완득이를 향해

물 컵에다 소주 한 잔 따라주면서 남의 일 얘기하듯이 전했는지도 모른다.

 

* 수업 시간에 자습을 시켜놓고 본인은 숙면 중인 동주

 

이 땅의 청소년들은 불쌍하다.

그런 교육 과정을 무탈하게 거쳐온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시선에서 바라 본

오로지 단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은 사뭇 불쌍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20년도 더 전에 태평양 너머 먼 곳에 있던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비 리그라는 목표를 향해 그저 획일화된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그들도 불쌍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높고 푸른 하늘과 형형색색의 풍경을 마주하고도 감상에 젖을 낭만도 없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찾아보려는 노력도 없이

그저 부모와 학교와 사회가 정해 놓은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그들이 안쓰러웠다.

어쩌면 그 때의 내가 그들과 같은 나이여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그들의 소심한 반항은 고작 숨어서 담배를 피워대는 일. 귀여웠다. 고작 저 정도가 문제아의 척도라니.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키팅 선생님이 나타났다.

획일화를 거부하고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며 세상을 숫자로 계량화하여 점수화하는 것을 벗어나

그 나이 때 할 수 있는, 아니 그 나이 때 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조용히 일깨워 준 선생님.

 

*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수업 방식을 갖고 있는 키팅

 

여기서 동주와 키팅의 공통점이 나타난다.

의지할 곳 없는 피 끓는 청춘 완득이가 킥복싱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을 발견한 닐이 연극의 오디션을 보고 주연 배우가 되어 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들의 아버지들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캬바레에서 춤 일을 할 때 봤었던 소위 기도들에 의해 생긴 싸움하는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기회를 아들에게 주고 싶었고 그래서 명문 의대를 졸업한 의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완득이의 아버지와 닐의 아버지는 반대했었다.

 

* 아들의 꿈을 반대하는 닐의 아버지.

 

하지만 동주와 키팅은 달랐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었고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들어 주었으며 앞에서 혹은 뒤에서 그들을 응원해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있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정도의 체력 싸움도, 부모와 학교가 모두 반대하는 연극 배우도 할 수 있었다.

만약 그 때의 그들에게 그것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런 채로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다면 그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자신의 이팔청춘을 돌아봤을 때 가슴에 아련하게 떠 오로는 추억이 없다면 그들은 정말 행복해 할까?

 

물론 두 영화의 차이점도 있다.

[완득이]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한 명이다 보니 완득이라는 인물이 그 나이 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혼자 표현해 냈다.

보무와의 갈등, 뜻하지 않았던 가슴 설레는 첫 사랑, 필리핀 엄마를 둔 한국 청소년의 심리까지.

반면 [죽은 시인의 사회]는 등장인물이 여럿이다 보니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한 10대의 감성을 표출해 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해 보려는 닐, 남자 친구가 있는 여자를 사랑한 녹스, 오래 전 같은 학교를 다녔던 형의 이름이 주는

무게감에 조심스럽고 소심해진 토드, 여자 꼬시는 일에 관심이 많은 찰리까지

 

* 엉뚱한 성격의 찰리.

 

결말도 다르다.

해피 엔딩이라는 것을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한국 영화의 특성 상 헤어졌던 완득이 식구가 다 모여 살게 되고

동주가 교회에서 새롭게 시작한 문화센터에서 완득이 아버지가 춤을 가르치게 되면서 완득이 집의 생계가 해결된다.

그리고 이 영화에 소소한 재미를 준 씨불놈아, 밤엔 좀 조용히 하자를 지속적으로 외쳐대던 옆집 아저씨 (김상호)

막걸리 한 잔 하다 연애 감정을 느끼고 결국엔 동주와 함께 살게 된 옆집 아저씨의 여동생 호정 (박효주)까지 행복한 결말을 그려낸다

 

* 시불놈아를 연발하며 재미를 주었던 옆집 아저씨.

 

반면 아버지에 의해 연극 배우의 꿈이 가로막힌 닐이 권총으로 자살하자 닐의 아버지는 자신은 뭘 잘못했는지 모른 채

학교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인을 의뢰하고 그 과정에서 카메론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은

키팅 선생님의 교육에 의해 아이들이 헛바람이 들었다는 문서에 서명을 하게 된다.

학교의 명예와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

결국 키팅 선생님은 학교를 떠 나게 되고 그나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는 교실에서 아이들은 하나 둘씩 책상 위에 올라

캡틴, 오 마이 캡틴을 외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닐의 죽음과 연이은 키팅 선생님의 퇴출. 그리고 학생들의 눈물을 통해 [죽은 시인의 사회]는 뜨거운 감동의 결말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 '캡틴, 오 마이 캡틴'을 외치며 떠나는 키팅 선생님에게 존경을 표현하는 학생들.

 

모티브도 다르다.

[완득이]는 동명 소설 [완득이]를 원작으로 했으며- 다행이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를 끝까지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톰 슐만(Tom Schulman)이 어린시절 다니던 몽고메리 벨 아카데미(Montgomery Bell Academy)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화를 한 데 묶어서 얘기하고 싶었던 이유는 영화 [완득이]이 있다.

밀레의 이삭줍기라는 그림을 보고 느낀 점에 대해 완득이는 이렇게 얘기한다.

 

뭘 봐? 이러는 것 같은데요.

 맨 오른 쪽 저 아줌마요. 곁눈질로 지금 뭘 봐?’

 일단 저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시집 온 이방인들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해질 필요가 있었어요.

 맨 오른쪽 저 아줌마 농장주인이랑 한 방 붙으려고 주먹 쥐기 일보 직전이고요, 맨 왼 쪽 저 아줌마 지금 일을 하는 척은 하고 있긴 한데

 사실 왼쪽에 쥔 지푸라기를 던져서 상대방의 시야를 가리고 한 방에 치고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아줌마는 주먹이 보통이 아닌 게 안에 돌멩이를 쥐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치사해도 어쩔 수 없어요, 싸움은 이기고 봐야 되니까.

 그리고 저 아줌마들 자기들 나라에선 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입니다.”

 

대체 밀리의 이삭줍기라는 그림을 보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전 세계 70억 명 가운데 누가 있을까?

 

 

물론 당시 킥 복싱을 배우고 있던 상황, 남의 나라에 와서 힘들게 일하는 엄마를 이제 막 알게 된 상황,

그리고 그런 엄마도 자기 나라에선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인데 남들이 하대하는 것이 싫었다는 아버지의 얘기들이 가슴이 남아 그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은 그 사람의 생각 혹은 감정을 언어로 형상화 한 것이라고 늘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얘기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어떤 대상에 대해 천편일률적인 생각과 감정을 버리고 사물을 새롭게 보며 획일화를 지양하는

키팅 선생님의 교육 방식과도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나가 아름다운 그림이에요혹은 뭔가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져요라고 얘기할 때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키팅 선생님의 교육이었으며 동주가 천편일률적인 선생님의 모습을 거부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 평범함을 거부한, 기존의 관습에서 바라보면 '꼴통'에 가까운 선생님인 키팅과 동주.

 

그리고 앞서 얘기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이들의 꿈을 응원해주는 선생님이라는 공통점까지.

그래서 어쩌면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은 완득이나 닐을 비롯한 학생들이 아니라 동주와 키팅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다지 폭력이지 않고, 천륜을 저지르는 사건도 없는 가슴이 따뜻해지고 감동 섞인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두 편의 영화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그런 멘토가 있을까? 아니 나는 누군가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해 줄 수 있는 멘토가 될 수 있을까?

 

카르페 디엠 (Seize the day)’. 오늘을 잡아라!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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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섹션 

- http://blog.daum.net/hks0518/12608545?srchid=IIMCCrKo000#Apcp_download.php?fhandle=MWJkZThAZnMxLnBsYW5ldC5kYXVtLm5ldDovMzgyMTI2Ni8wLzEyLmpwZw==&filename=12.jpg&srchid=IIMCCrKo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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