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본 [시티 헌터]라는 일본 만화책은 킬러가 이다지도 밝은 모습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굳이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킬러란 어떻게든 결국에는 우울하고 어두운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인식 되어 왔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무도 모르게 특수 훈련을 받고 아무도 모르게 임무를 수행하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게 킬러들의 운명이라면
그들만큼 슬픈 인생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움과 긴장감 단 두 가지 감정에 집요하게 매달린 채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살아야 하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무리 외롭다, 힘들다라고 투정을 부리지만 익히 알려진 그들의 인생에 비교해보면 견딜만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전직 특수부대 요원이자 전쟁 시 살인 병기 역할을 했던 차태식. 누군가에 의해 아내가 살해 당하자 어느 한적한 동네에서 작은 전당포를 운영한다.
밤업소 일을 하는 엄마를 둔 소미는 우연한 기회에 언제나 말 없이 과묵한 차태식과 친하게 지낸다.
어느 날 클럽에서 마약을 훔쳐 도망친 엄마는 마약을 거래하려던 만석, 종석 형제에게 죽임을 당하고 소미는 그들에게 납치된다.
그러자 납치된 소미를 찾아 차태식은 소미를 구하기 위해 그들의 소굴로 직접 찾아 들어간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지만 집안 차이로 두 사람의 만남을 반대했던 여자의 아버지는 여자가 계속 레옹을 만나자 여자를 죽여 버린다.
하지만 집안이 빵빵한만큼 사고사로 포장하여 이틀 만에 풀려 나게 되고 이에 분개한 레옹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날 밤 바로 미국 뉴욕으로 건너와 후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토니 아저씨를 돕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때가 불과 열 아홉살.
그 이후 레옹은 줄곧 어둠의 청부살인업자를 하며 돈을 벌게 된다.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는 원빈의 연기에 대한 의구심과 무척이나 단순해 보이는 줄거리에 흥미를 잃어 스치듯 지나갔다가
CATV를 통해 접하고는 눈을 뗄 수 없었던 작품, [아저씨].
여전히 입 안에서 웅얼거리지만 한결 나아진 원빈의 연기는 원톱으로 어색하지 않았으며 내용 역시 장기 밀매와 어린이 납치와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담고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까지 대한민국에서 흔치 않았던 ‘킬러’를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상당히 좋은 인상을 받았다.
물론 [아저씨]의 차태식을 킬러라고 하는데는 이의의 여지가 있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군대에서 전쟁에 대비해서 받은 훈련을 몸에 익히고 있었고
그 기술을 활용하여 소미를 구하는 것이니까.
다만 아쉬운 점은 결말 자체가 지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전형적인 ‘해피엔딩’이라는 점이다.
기존에 보지 못했던 화려한 액션, 피가 튀기는 칼질과 총알이 오고 가는 화면 속에서 느꼈던 긴장감,
요즘말로 염통이 쫄깃해지는 긴장감이 계속되다가 결국은 선한 쪽이 이긴다는 권선징악을 바탕으로 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니까 조금 허무하기도 했다.
뭔가 여운이 없다고 해야 할까, 그냥 한바탕 신나는 영화 보고 난 느낌?
1994년 가을의 찬바람이 인사를 시작했을 무렵, 그러니까 추석 연휴의 첫 날, 지금은 없어진 청담동 씨네 하우스에서 보고는 반해버린 영화, [레옹].
어떻게 킬러의 기술을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영화 내내 나오지 않지만 이 영화 이후 장르노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마다 [레옹]이 가장 먼저 떠올랐으니
이 영화가 주었던 강렬함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인상적인 것인 12살 마틸다가 레옹의 앞에서 마돈나 혹은 마를린 먼로로 분장하는 장면이나 레옹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영화 중에서 주인공이 죽는 유일한 영화라는데 있다.
레옹이 동생의 복수에 대한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자 직접 해결하러 간 마틸다는 복수에 실패하고 레옹에 의해 구출되지만,
경찰 신분을 이용한 대 테러 진압 부대까지 동원해 레옹을 없애려 하는 상대방의 물량 공세에 타고난 킬러인 레옹도 어쩔 수 없이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옹은 죽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흐릿한 방복면의 안에서의 시야를 벗어나 미리 탈출시킨 마틸다를 볼 수 있는 밝은 세상의 빛을 다시 볼 수 있기 직전 총에 맞아 죽어가는 레옹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루한 자신의 운명? 킬러로써의 인생의 회한? 마틸다의 고백?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레옹이 살아온 인생 그 자체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레옹이 들고 다니던 화분을 들고 학교로 간 마틸다는 레옹의 인생이 안타깝게 끝나지 않도록 레옹의 분신과도 같은 화분의 식물을
학교 교정에 옮겨 심는다. 뿌리가 내릴 수 있도록. 레옹의 죽음으로 그의 인생이 끝나지 않도록. 그리고 그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그래서 여운이 꽤 길게 남는다.
저 소녀는 과연 옮겨 심은 식물을 언제까지 관리하면서 레옹을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함께.
그래서일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나오는 Sting의 'Shape of my heart'는 이 만큼 이 상황에 어울리는 음악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귓가에 오래 맴돈다.
정말 솔직히 얘기하자면 짜임새에 있어서는 솔직히 아저씨가 레옹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 개인적 의견이다.
첫 번째로 레옹은 캐릭터의 특징을 인상 깊게 잘 만들었다.
짧은 덧 모자, 늘 들고 다니는 화분 그리고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무기를 감추기 위해 항상 겉에 입는 긴 코트까지
캐릭터를 상징하는 요소를 많이 배치했지만 [아저씨]는 원빈이 스스로 머리 깎는 장면을 제외하면 캐릭터의 특징을 잡을 만큼의 인상 깊은 장면이 없다.
두 번째로 인물 설정 구조다.
[아저씨]는 말 그대로 동네 아저씨 역할로써 동네 꼬마인 소미를 구하는 관계,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소미는 결국 아무런 특징 없이 차태식의 보조 역할로 끝나는 반면,
[레옹]은 복수심에 가득찬 12살 마틸다가 스스로 킬러가 되고 싶어하며 자기보다 20살도 넘게 차이가 나 보이는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역할로
장 르노와 투 톱으로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당당한 주인공으로 영화의 마무리까지 담당한다는 것이다.
이 것이 중요한 이유는 결국 이 영화가 단순한 액션 영화로 끝나느냐 아니면 강렬함과 여운이 남아 계속해서 되새겨지는 영화가 되느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12살 마틸다 역을 소화했던 나탈리 포트만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블랙 스완’의 여주인공으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왔다.
어린 시절 보다 못한 얼굴, 어린 시절 보다 못한 각선미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영화를 보게 만들었던 힘은
아마도 레옹이 주었던 그 여운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그렇다고 [아저씨]가 나쁜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짜임새 있는 이야기 흐름이나 다양한 액션과 같은 볼 거리와 함께 전문 킬러는 다룬 거의 최초의 영화라는 점 등
볼거리가 충분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만약에 [아저씨 2]가 제작된다면 전편의 재미에 무언가 하나를 더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 번 해본다. 그 무언가는 감독이 만들어 낼 테니까.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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