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어떤 일이나 사물에 마음을 쏟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림, 마음이 쏠려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게 되다.
예전에, 그러니까 10여 년 전만해도 주변 친구들로부터 ‘정글에 혼자 떨어져도 살 놈’이란
얘기를 듣곤 했었다.
아마도 이 것은 꼭 이래야만 한다, 라는 것이 없었다는 뜻이리라.
먹는 것도 가리지 않았고 잠도 바닥이 딱딱하지만 않으면 아무데서나 잘 수 있었고
쉽게 얘기하면 주어진 환경에 맞게 사는 것이 나 스스로도 편했던 시절이었다.
한마디로 무언가에 집착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란 영물(靈物)은 사람의 성격도 그리고 체질도 바꿔 놓았다.
이제는 ‘이 것은 꼭 이래야만 한다’라는 것이 꽤 많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마음이 꽤나 불편해진다. 찝찝해진다고나 할까.
늘 해오던 생활습관이 작은 어떤 무엇에 의해서라도 바뀌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집착이 생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집착이란 익숙함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익숙한 것을 찾게 되어 있으니까. 그 익숙한 것이 조금만 바껴도 불편함을 느끼게 되어 있으니까.
이름도 희한한 새 희망 바이오 아파트. 그 곳 301호에 한 여자가 이사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301호 여자 (방은진)는 결혼 생활 내내 끊임없이 새로운 요리를 남편에게 선보이며 ‘어때, 맛있어?’를 반복하고
이에 싫증난 남편과의 관계가 틀어지며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을 앞두고 그녀가 남편에게 해 준 마지막 요리는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애완견인 쫑쫑이 (마르티스)를
재료로 한 충격적인 요리.
301호 여자는 타인의 관심과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을 요리로 표현하는 여자다.
301호의 맞은편에 사는 302호 여자 (황신혜)는 정육점을 운영하면서 자신을 성폭행 한 의붓아버지와
돈만 아는 어머니 사이에서 불안한 청소년기를 보낸다.
결국 정육점이 상징하는 음식과 의붓아버지의 성폭행으로 상징되는 성관계라는 두 가지 요소가
평생 그녀를 옥죄며 그 어떤 음식도 먹지 못하게 되고 그 어떤 남자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경성 식욕부진1’에 시달리게 된다.
302호 여자는 과거 경험의 무의식적인 트라우마에 대한 끊임없이 집착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여자다.
301호 여자는 그런 302호 여자에게 자신의 요리를 끊임없이 제공하며 먹기를 강요하고
302호 여자는 그녀의 요리를 끊임없이 버리며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 되는데,
결국 302호는 자신을 요리 재료로 해줄 것을 부탁하고 301호는 302호를 요리 재료로
(영화상에서의) 마지막 요리를 만들고는 천천히 음미한다.
그렇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의 이 영화는 두 여자의 끝없는 집착을 충격적인 소재로 한 영화인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장정일 작가의 시(時) [요리사와 단식가]를 그대로 영화화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요리사와 단식가]에 등장하는 요리에 집착하는 301호 여자와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302호 여자가 그대로 표현되며
301호 여자의 요리 재료가 되기 위해 스스로 기꺼이 희생하는 302호 여자의 행동까지 그대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리사와 단식가]의 내용은 시치고는 꽤 긴 분량이기 때문이 검색을 통해 확인해 보길 바란다)
결국 이 영화는 (시도 그렇지만) 인간의 주된 욕망 중 서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식욕과 성욕을 동일 선상에 놓고
그것에 대한 집착-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통한 사람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만큼이나 섹스를 좋아하는 301호 여자와
원치 않는 성폭행 때문에 음식까지 온 몸으로 거부하는 302호 여자는
결국 식욕과 성욕에 대한 집착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와 영화는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스스로 요리의 재료가 된 302호도, 사람을 재료로 한 요리를 먹는 301호도
결국 혼자 살고 있다는 외로움을 끝낸 것일까라는 물음인데,
어떤 면에서 보면 기이한 과정을 거쳐 혼자 사는 두 사람이 하나의 몸뚱이로 합쳐진 것이 되니
외로움은 끝나야 하겠지만 영화도 시도 그렇게 긍정적인 결말을 전해주지는 않는 듯하다.
사실 199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극장에서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내용도 없고, 사람을 몰입시키는 그 어떤 장치도 없이
오로지 두 여자의 심리만으로 1시간 40여분을 끌고 나가는 힘이 대단했다고나 할까.
물론 그것이 1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조금은 지루하고, 억지스러운 전개
-302호는 왜 원치도 않는 301호 여자를 자기 집에 드나들게 했으며 301호의 음식을 강하게 거부하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토록 온 몸으로 음식을 거부할 정도로 음식이 싫다면 이웃집 여자쯤이야
문 닫고 안보고 살면 그 뿐일텐데 말이다-가 눈에 들어 오기도 하며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감독의 욕심 때문인지 작품의 완성도는 약간 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당시로써는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소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괜찮은 작품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시선을 돌려 이 영화를 배우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놓고 본다면 방은진과 황신혜라는 두 주연배우가 활약한 듯 보이는 이 영화는
사실은 방은진 주연-황신혜 조연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만큼 방은진의 ‘집착’하는 연기는 빛을 발했지만 황신혜는 사실 토하는 것 빼면 이렇다 할 연기를 보여 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니까. 표정 연기도 대사처리도 딱히 배우로써 칭찬할 만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냥 예쁘고 날씬한 배우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고나 할까.
얼마 전 이 영화가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 될 예정이라는 뉴스를 접했다.
배우도 감독도 모두 섭외 되었다고 한다.
과연 헐리우드 영화가 장정일의 시를 모티브로 한 301·302를 얼마나 잘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우려도 되지만
헐리우드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낼 ‘집착’에 대한 영화를 살짝 기대해 본다.
- 음식에 사랑이나 섹스를 결부시키는 것. 음식이 사랑을 운반하는 도구라고 인식하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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