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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 이어집니다)
지난 영상까지는 콜럼버스에 의한 1차 대항해시대에 대해 살펴 봤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그 이후 2차 대항해시대 기간 동안 신대륙인 중남미가 스페인에 의해 어떻게 초토화되었고, 핏빛으로 물들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콜럼버스가 사망하면서 신대륙∙노예∙금이라는 유산이 남겨졌고, 제2, 제3의 콜럼버스가 생겨났는데, 그때 제2의 콜럼버스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입니다.
아즈텍 제국의 멸망
그는 1519년 군인 600여 명, 말 6마리를 이끌고 유카탄 반도 (현 멕시코 동북부 칸쿤이 있는 지역)로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1521년, 200년간 이어져 온 무려 인구 600~7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아즈텍 문명을 무너트렸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당시 아즈텍 문명의 전체 인구가 2,500만 명 정도였다고 하고 수도만 30만 명이었다고 하기도 하는데요, 당시 런던이나 파리 인구가 10만 명 내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구를 가진 국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국가를 단 600여 명의 군사로 무너트린 것인데요, 아즈텍이 이렇게 허무하게 멸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군사력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길었던 레콩키스타라는 전쟁이 끝난 뒤라 전쟁 전략과 전술이 향상되었었는데, 특히 전쟁이 끝나고 할 일이 없었던 군인들이 에르난 코르테스 무리에 합류한 것입니다.
또한 당시 최강의 검이라 불리던 톨레도 검과 화승총을 사용했는데, 이 중에서 총소리는 원주민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반면에 원주민들은 흑요석을 나무에 박은 몽둥이를 무기로 사용했고, 당시 아즈텍 제국 지역에는 거대 포유류도 없었기 때문에 말도 처음 본 것이었습니다. 즉, 거대한 말 위에 갑옷을 입은 스페인 군인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죠.
두 번째로 전쟁 방식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정복을 위해 저항하는 원주민을 죽이는 방식이었기에 거칠 것이 없었지만, 아즈텍인들은 인신공양을 위해 산 채로 적군을 획득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전쟁에 있어 일정 부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 아즈텍 제국에 인신 공양이 성행했던 이유로는 제물로 바칠만한 거대 포유류가 없었고, 물자가 부족한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특성 상 인구 수를 조절하기 위해서라는 연구가 있었습니다.
아즈텍 제국이 쉽게 멸망한 세 번째 이유는 바로 주변 부족들의 도움이었습니다.
인신공양을 위해 아즈텍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주변 다른 문명이나 민족에게 반감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실제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침략할 때 다른 부족들이 위치도 알려주고 다른 부분에서도 여러 가지로 도와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아즈텍 제국의 멸망 이후 또 한 명의 스페인 사람이 남미의 다른 거대한 문명 하나를 무너트립니다.
잉카 제국의 멸망
대항해시대 당시 남미에는 현재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잉카 제국도 있었습니다.
현재의 칠레와 페루 등 남미 서쪽을 지배하던 문명이었는데요,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약 100년 간 번성했던 제국이었습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애니메이션 ‘태양소년 에스테반’의 배경이 바로 잉카 제국입니다.
그리고 이런 잉카 제국을 무너트린 사람이 바로 프란시스코 피사로라는 인물인데, 단 180명의 군대만으로 1533년에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쉽게 잉카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아즈텍 제국 멸망과 마찬가지로 주변 부족들의 도움이었습니다.
당시 잉카 제국은 자신들에게 저항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지역의 모든 남자들을 학살했고 인구의 절반 이상을 죽이는 등 잔인한 보복을 일삼았기 때문에 주변 부족들은 잉카 제국에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 안내를 자처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피사로는 쉽게 잉카 제국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계략입니다.
피사로는 잉카 제국의 왕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왕이 면담하러 오자 인질로 삼은 것입니다.
그때 잉카의 왕은 ‘날 풀어주면 이 방을 금으로 다 채워줄게’라고 하면서 풀려났고, 실제로 무려 24톤이라는 금을 주었지만 피사로는 왕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왕, 즉 최고 지도자를 갑자기 허무하게 잃은 잉카 제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문제는 피사로가 이때 받은 금을 다 녹여서 금괴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금괴나 골드 바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잉카의 왕이 주었던 것은마치 신라의 금관처럼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굉장히 높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잉카 문명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기회가 사라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문화재라는 개념 그리고 문화와 그 가치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을 정도로 당시 유럽인들은 무지하고 무식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는 스페인 독감이라고 알려진 천연두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잉카 제국에는 없었던 천연두 바이러스가 피사로 일행들을 통해 유입되면서 잉카 사람들이 감염되어 속절없이 사망했고, 그 결과 잉카 제국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페인은 이런 현상을 두고 ‘우리가 잉카 제국을 멸망 시키거나 그들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며 지금까지도 변명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만행과 남미 침탈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14세기 중반 흑사병 이후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적게는 1/3에서 많게는 유럽 사람의 ½이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후 흑사병 이전의 인구를 회복하는데 무려 약 두 세기가 걸렸습니다.
반면에 잉카, 아즈텍 등 신대륙 원주민들은 아직도 예전의 인구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잉카 제국의 네 번째 멸망 이유가 바로 스페인의 착취와 학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잉카제국의 최후를 기록한 신부이자 수도사인 라스 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대한 간결한 보고]에는인디오에 대한 침략자들의 잔혹한 행위가 다음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극악무도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친 인디오들은 산에 틀어박히거나 산 깊숙이 도망쳐 몸을 피했다. 그러자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잡아내는 사냥개를 사나운 개로 훈련했다. 개는 인디오를 발견하면 잔인하게 물어 뜯고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었다.
#2. 스페인인들은 원주민들에 대해 이상할 정도의 잔혹성을 보였다. 어린이 노인, 임산부, 혹은 출산 중인 여인까지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머리를 단 번에 잘라낼 수 있는가에 대해 서로 내기를 걸었다. 어머니의 품 안에 있는 아이를 낚아채 강물에 집어던지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악마의 자식들아, 그곳에서 펄펄 끓어라'
이처럼 원주민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무차별적인 학살은 나중에 벌어질 아프리카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노예 무역의 시작이며 현재까지 벌어지고 있는 인종 차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량 학살과 노예화로 인구수가 줄어 새로운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스페인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들이 차례로 무너지면서 대항해시대는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되는데, 바로 전 세계를 향한 약탈을 시작한 것입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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