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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으로 보는 인문학 강연

[인문학 대항해시대 (2)]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이유: 레콩키스타, 토스카넬리지도, 산타페 각서

by Robin-Kim 202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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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어린 시절 선원생활을 했던 이태리 제노바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지중해) 무역이 활발했음.

 

다양한 화폐가 오가갔던 특성상 환전상이 있었고, 그들은 길가의 벤치에서 일을 했음. 영어 Bank의 어원이 bench라고 함. 그래서 이런시절부터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음.

 

1476년 콜럼버스가 탔던 상선이 해적의 공격으로 침몰됐고, 포르투갈의 어느 해안까지 간신히 살아서 떠밀려옴 (아들이 쓴 얘기임).

 

실제로는 해적이 아니라 사적으로 약탈하는 사략선의 공격을 받았을 거로 추정. 당시 정부와 계약을 맺고 전시에 적선을 공격할 권리를 받은 배를 사략선이라고 불렀음. 이게 해적화 됨.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던 콜럼버스는 책을 통해 지식 습득. 당시 책은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50만원정도까지 했었음에도 다양한 책으로 공부를 했음. 그 중에서도 여행기를 좋아했음.

 

1485년 포르투갈 왕인 주왕 2세를 만남. 왕에 의해 전문가들이 콜럼버스 의견 (인도를 찾으려면서쪽으로 가자)을 검토해보라 했으나 불가능하다는 의견 일치.

 

그래서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감.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 건축의 정수임. 718년~1492년까지 약 800년간 이슬람 지배 받았음.

 

레콩키스타 (이베리아 반도의 카톨릭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 축출을 위해 벌인 국토 재정복 운동) 벌임

 

콜럼버스가 스페인을 찾아갔을 때는 그라나다 왕국만 이슬람 세력으로 남아 있었음

 

14세기부터 스페인-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연안의 섬들을 두고 싸우고 있었음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토스카넬리가 만든 지도를 바탕으로 서쪽으로 5주만 가면 아시아가 나온다고 설득. 하지만 스페인 신하들은 반대.

 

그런데 1492년 1월에 레콩키스타가 종료된 김에 콜럼버스에 투자하기로 함

 

 

영토 확장의 욕망 + 이사벨라 여왕이 투자한 게 아니라 왕실 돈이 아니라 스페인의 팔로스라는 도시에서 재정의 대부분을 지원한 2가지 이유로 콜럼버스 항해 가능

 

산타페 각서 체결: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가 서명한 콜럼버스 1차 항해의 조건이 제시된 문서 (수익 배분 등)

 

<각서 내용>

 

1) 성공 시 콜럼버스를 탐험대의 해군 제독으로 임명한다

2) 콜럼버스를 신대륙의 부왕 겸 총독으로 임명한다

3) 콜럼버스는 신대륙에서 획득한 금, 은 등 산물의 1/10을 소유한다

4) 신대륙과 스페인 사이 소송이 일어날 경우 콜럼버스가 재판장과 재판권을 갖는다

5) 이 권리와 명예를 콜럼버스의 자손이 대대로 물려 받는다

 

이사벨 1세가 모두 수용.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을 거라 예상. 신대륙 발견 후 18세기 중반까지 스페인 왕실과 콜럼버스 후손이 계속 소송했음

 

산타마리아 범선 3척 마련. 배는 크지 않았음. 위험했기 때문에 선원지원자가 없어서 처음엔 죄수를 활용하려 했음.

 

이사벨라 여왕이 배를 타면 죄를 사해주겠다고 했으나 4명만이 지원. 어느 항구 도시에 가서 어느 신부의 도움으로 90명의 선원 구함. 항간에는 술집에서 술을 산 후 술에 취했을 때 동의서 얻었다는 얘기가 있음.

 

가도가도 끝이 없자 선원들이 폭동 직전까지 갔을 때 다독이며 도착한 곳이 바하마제도 (산살바도르 섬). 바하마제도는 현재 영국 연방의 섬나라.

 

콜럼버스는 인도에 왔다고 착각해서 그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름.

 

원주민들이 경계하자 콜럼버스는 유리구슬 같은 선물을 추면서 친화정책 씀.

 

1492년 10월 15일 1차 항해일지 중: 내가 그들에게 칼을 보여주자 아무것도 모른 채 칼날 쪽을 잡았다가 손을 베기도 했다…(중략)…50명만 동원하면 그들 모두를 복종시킬 수 있고, 또 뭐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할 수 있다 (-à 굉장히 온순했던 것으로 추청)-à비극의 전주곡

 

당시 원주민들은 코와 손목에 금을 걸치고 있었음. 콜럼버스가 금 어디서 났냐고 묻자 남쪽으로 가면 있어라고 함. 그래서 콜럼버스 일행이 찾아간 남쪽이 쿠바임.

 

1493년 4월 15일에 귀국함. 왕과 여왕에게 보고.

 

귀국할 때 소량의 금과 은, 유럽에서 보기 힘들었던 허브와 약초, 앵무새를 갖고 감. 당연히 후추는 없었음.

 

그리고 신대륙 원주민을 강제로 데리고 와서 인도 갔다왔다는 것을 증명. 굉장히 비인간적이고 비극적임.

 

반면 스페인 왕들은 성공적인 항해라고 생각하고 콜럼버스를 신대륙의 부왕이자 총독으로 콜럼버스 임명 (산타페 각서). 인생 역전 됨.

 

신대륙 (당시 인도)=기회의 땅이라는 인식이 퍼지며 광풍이 불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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