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익.
캔 맥주 하나를 땄다.
날씨가 너무도 화창한,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을 것만 같은, 일요일 한 낮에 내가 한 건
맥주를 따고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몇 모금 마신 것, 그것이다.
띠리링.
에어컨을 켜니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찬바람이 쏟아져 나온다.
누군가와 같이 살았다면- 그것이 부모님이든 형제자매든 마누라든-
왜 나가서 놀지 않냐, 누군가를 만나야 하지 않냐, 사진을 찍으러라도 나가야 되는 것 아니냐,
결정적으로 시간이 아깝지 않냐라는 잔소리가 눈에 훤하다.
쓰윽.
과자 봉지를 하나 뜯었다. 과자 봉지 뜯는 소리가 ‘왜 쓰윽’인지는 묻지 마시라.
그냥 그렇게 표현하고 싶으니까.
오늘의 오후는 정말 오랜만에 맞아보는 정말 휴일 같은, 다시 말하자면
뭔가 할 일이 남아 있어 뒤가 당기지 않는 그런 오후란 것에 감사한다.
설거지도 다 했고, 청소와 빨래도 다 했으며 회사 일도 신경 쓸 건 없다.
다만 약간의 다리미질과 화장실 청소가 남았으나,
화장실 청소야 까짓 거 다음주에 해도 되고 다리미질이야 이따 저녁에 해도 된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치익’하고 딴 맥주와
‘쓰윽’하고 뜯은 과자를
‘띠리링’하는 소리와 함께 켜진 에어컨 바람 밑에서
시원하고 맛나게 먹어주면 되는 것이니
이 얼마나 평화로운 오후인가.
책보다가 잠들고 일어나서 다시 책 보다가 밥 먹고 다시 책 보다가 잠들고..
뭐 매일 매일이 이렇다면야 오죽 좋겠냐만,
사람 사는 게 마음먹은 대로만 되는 건 아니니
7일 중 단 하루라도 저런 생활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바로 그런 생활의 한 가운데에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지난 금요일 밤부터 조금 전까지
잠잔 시간을 계산 해보니 총 23시간이다.
금요일 밤부터 현재까지 48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잠잔 시간이 23시간이라니,
아무리 그 동안 몸이 조금 아프거나 정상은 아니었다고 하나
너무 많이 잔 것은 아닌가 싶지만,
뭐 어때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책 보고 싶으면 보는 거지.
그래,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혹은 권리 같은 것도 있는 거니까.
우리는 너무 주변에서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법’에 대해 강요 받는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열심히 살아야 성공할 수 있고, 그래야 편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도록 강요 받는다.
그래서 무언가를 하지 않거나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마치 시간과 인생을 낭비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 어느 책에선가 다음과 같은 얘기를 본 적이 있다.
한 서양 부자가 필리핀의 어느 어촌을 방분할 일이 있었단다.
그런데 그 부자 눈에 들어 온건 해먹에 누워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젊은 친구.
하여 그 젊은 친구에게
‘이보게, 지금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늙어서 고생하게 된다네.
젊은 친구가 시간을 너무 허비하는구만’이라는 말을 건네자
그 젊은 친구가 대답하기를
‘난 지금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지요.’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히고 사는 것이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때로는 지금 현재의 행복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와 권리가 우리에겐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이순간에도 난 졸립다.
치익, 쓰윽, 띠리링.
그렇게 한 숨 더 자야 할 듯 하다.
이처럼 맑은 휴일날 오후에-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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