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 그러니까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어지는 1990년대가 시작되기 직전에 우리나라 극장에 꽤나 독특한 미국 영화 한 편이 개봉됩니다.
[비 오는 날 수채화]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멜로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코메디 영화도 아닌 독특한 영화였는데요, 지금까지 ‘로맨틱 코메디’라고 불리는 장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When Harry Met Sally)]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맥 라이언은 당시 한국 남자들에게 이상형 같은 존재가 되었고 1990년대 초반에 개봉된 [프렌치 키스]를 통해 완전히 이미지를 굳히며 한국 화장품 광고에도 출연했었죠.
그리고 1996년 한국에는 또 다시 전혀 낯선 형태의 미국 영화가 개봉됩니다.
독일에서 프랑스로 가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두 젊은 남녀가 오스트리아에 내려서 딱 하루를 함께 보낸다는 내용의 영화인데요,
에단 호크라는 낯선 배우를 일약 스타로 만들며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입니다.
이 두 영화를 인상 깊게 만든 공통점을 생각해 보면 남녀 주인공들의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남녀 사이에서 우정은 없으며 섹스 없는 남녀 관계는 없다’라는 지론을 가진 해리와 식당에서 음식 하나를 주문할 때도 아주 세세한 것까지 자신의 취향을 요구하는 샐리는 총 세 번의 우연한 만남을 갖게 되면서 끊임없는 대화를 나눕니다.
처음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함께 가면서 샐리의 낡은 차에서, 5년 후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사회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공항에서 만나면서, 그리고 또 다시 5년 후 뉴욕의 어느 서점 안에서.
이 만남이 재미있는 것이 처음 두 번의 만남에서 두 사람은 끝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 잘 맞지 않는 관계’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마지막 만남에서 두 사람은 서로 이성 친구,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남사친’, ‘여사친’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첫 만남에서부터 10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가 들어서였을 수도 있고, 해리는 이혼을 앞두고 샐리는 사귀던 남자와 헤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외로워서였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관계가 발전하면서 더욱 더 끝없는 대화를 생산해 냅니다.
밥 먹으면서 대화하고, 차 마시면서 대화하고, 산책하면서 대화하고, 갤러리에서 대화하고, 침대에 누워 전화로 대화를 하는 등 끝없이 대화를 생산해 내죠.
물론 모두 알다시피 해리와 샐리가 친구 사이를 넘어 연인이 되는 장면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해리와 샐리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유부남을 짝사랑하며 몰래 데이트를 즐기는 샐리의 친구 마리와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해리의 친구 제스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해리는 샐리에게 제스를 소개해주고 샐리는 해리에게 마리를 소개해주려고 만난 2:2 미팅에서 오히려 마리와 제스가 눈이 맞아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해리와 샐리, 해리와 제스, 샐리와 마리, 제스와 마리라는 관계들 속에서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지는 영화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큰 반전이나 관객입장에서 감정의 변이를 느낄 수 있는 변곡점 없이 그냥 쭉 흘러가는 형태입니다.
게다가 딱히 코메디적인 요소가 강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꽤나 재미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 다시 보니 조금 지루한 면이 있긴 했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비포 선라이즈]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소문으로 들었던 이 영화의 내용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하루 동안 데이트를 즐기는 내용이라는 것이어서 저와는 안 맞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좋다는 영화니까’라는 생각에 처음 봤는데 결과는 ‘역시나’였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두 사람은 끝없는 대화를 나눕니다.
기차에서 대화를 나누고, 기차에서 내려서 대화를 나누고, 산책하면서 트램을 타고 이동하면서 무언가를 먹고 마시면서 끝없이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 공원에서 두 사람을 사랑을 나눕니다. 이른바 ‘원 나잇’인 거죠.
그런데 이게 말이 좋아서 ‘원 나잇’인 거지 요즘으로 치면 공공장소의 잔디밭에서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공연 음란죄’에 해당될 수도 있고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 쓸 수 있는 행동입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했던 점은 철저하게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그래도 형형색색으로 이뤄진 뉴욕의 멋진 가을 풍경을 보거나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오래된 부부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서 다양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있는 반면에 [비포 선라이즈]는 여행지의 멋진 풍경도 없고 독특한 그 나라만의 분위기도 없이 그냥 주구장창 두 사람의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영화의 결말도 너무 허무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원 나잇까지 한 관계의 두 남녀가 각자 갈 길을 가면서 영화가 마무리되는데 이게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끝난 것처럼 혹은 무나 당근의 중간이 싹둑 잘려 나간 것처럼 갑자가 끝나니 꽤나 당황스러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까’라고 생각을 해보니 바로 ‘여행에 대한 로망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청춘 남녀들이 기차든 버스든 여행을 하면서 우연한 만남을 꿈꾸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바로 그것을 자극한 것입니다.
‘기차를 탔다, 낯선 이성을 만났다, 대화가 잘 통했다, 그래서 목적지가 아닌 아무 곳에서 내렸다, 계속 대화하면서 데이트를 했다, 그러다가 공공장소 (공원 잔디밭)에서 원나잇을 했다’까지 이러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늘 꿈꾸던 로망을 자극한 것이죠.
지금도 국내뿐 아니라 외국 여행지에 가면 많은 청춘 남녀들이 그런 로망을 꿈꾸며 다니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어찌됐든 두 영화를 통해 제가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 된 점은 서양 사람들은 정말 대화를 좋아한다 (나쁜 말로 하면 수다쟁이), 그리고 그 대화를 하면서 본인 얘기를 참으로 많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난 어디서 태어났고, 어떤 가정 환경에서 자랐고, 우리 가족은 어떤 성향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학교를 다녔고, 자라면서 어떠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처럼 말이죠.
우리나라와는 문화가 상당히 다르긴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느낀 점이 있다면, 그런 수다쟁이 같은 대화가 때로는 사랑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해리와 샐리처럼 오래된 친구가 연인이 되기도 하고 제시와 셀린처럼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어쩌면 수다는 사랑을 만들어 내는 매개체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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