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은 중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였다.
내가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이 아니라 외할머니가 그때 돌아가셨는데, 외할머니의 죽음이
내가 이 세상에서 첫 번째로 경험한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그 시절에는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외갓집의 상황이 그랬었는지 잘 모르지만
장례식을 집에서 치렀다.
외할머니가 다니시던 교회 분들과 아버지 친구분들이 오셨고, 몇몇 분들은 화투를 즐기시고
몇몇 분들은 술을 즐기시는 이른바 TV에서 보던 그런 장면에 대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생각해보면 단독주택도 아니었는데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해주었던 이웃들이 지금 생각해도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는 30대 초반에 친 할머니가, 제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렇게 난 현재까지 3번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죽음 하나하나마다 그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보다는 더 길게 이어진다는,
더 강하게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특정한 상황과 결부되어 떠오르는 그들의 모습 혹은 그들과의 추억들이
과연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떠오를까라고 반문해보면
확실히 죽음이란 것은 단절이라기 보단 더 강한 연결에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건 남아 있는 사람의 입장일 뿐
떠나는 사람의 입장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모든 떠나는 사람은 남아있는 혹은 남겨진 사람에 대해 더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간직한 채로 죽음을 맞이하니까.
그런 미안함과 죄책감을 귀신이 되어 갚아나가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을 통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감정 중 하나인 ‘감동’을 건들임으로써
차태현과 신인 여배우 강예원의 불안한 호흡과 곳곳에 숨어 있는 손발 오글거리는
어색한 모습을 충분히 감추고도 남는다.
다양한 조연들의 돋보이는 연기력, 차태현만이 할 수 있는 어눌해 보이는 연기,
그리고 그런 배우들의 연기력을 살려준 돋보이는 시나리오보다 이 영화를
더 감동적이게 만든 것은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겹쳐 보이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특정하거나 혹은 다양한 모습과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에 대한 추억들이었다.
그러면서 한 번 생각해 본다.
내가 만약 지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과연 나는 그 누구에게라도 미안함과 죄책감을 갖고 이별을 하게 될지
아니면 만족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별하게 될지,
그것이 궁금해진다.
Leg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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